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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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90년대 패션, 복고문화로 살아나다

허리에 묶은 셔츠·배바지·질질 끌리는 힙합바지…
해외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가수 싸이의 뮤직비디오 ‘강남스타일’은 사실 요즘 거의 쓰지 않는 용어다. 강남스타일은 강남과 강북 패션스타일이 확연하게 구분되던 1990년대 주로 쓰던 용어다. 90년대 강남스타일은 압구정을 중심으로 미국이나 유럽 패션의 영향을 받은 유학파나 부유층 젊은이들의 패션을 의미했다. 그러나 인터넷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지역 간 경계가 무너지고, ‘강남좌파’ ‘교육일번지’ 등 강남이 정치사회적 외피를 두르면서 유행을 선도하던 ‘패션특구 강남’의 이미지는 점차 희미해졌다.

2011년 5월 개봉해 우리 사회에 ‘복고’ 열풍을 일으킨 영화 ‘써니’의 한 장면.
◆90년대 ‘강남스타일’


영화 ‘건축학개론’과 드라마 ‘응답하라 1997’(tvN), ‘신사의 품격’(SBS)은 90년대 유행했던 의류 브랜드와 소품, 패션 스타일이 완벽하게 재현돼 30, 40대의 향수를 자극했다.

대학 신입생을 주인공으로 한 ‘건축학개론’에는 청남방과 짝퉁 게스(GUESS) 티셔츠가 등장하고, ‘신사의 품격’에서는 지금은 40대 초반인 주인공들의 대학시절 회상 장면에 셔츠를 허리에 묶는 패션과 ‘잔 스포츠’ 백팩 등이 등장했다. 90년대 고교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응답하라 1997’에서도 주인공들이 주로 교복을 입지만 ‘게스’ ‘안전지대’ ‘겟 유즈드’ ‘인터크루’ ‘엘레쎄’ 등 당시 유행했던 추억의 브랜드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의상을 책임지고 있는 민선휴 실장은 “드라마 배경은 부산이지만 당시 고등학생들 사이에 인기였던 강남스타일에 초점을 맞췄다”면서 “헐렁한 티셔츠에, 바닥을 질질 끌고 다닐 정도로 길고 통 큰 바지 등 힙합스타일을 비롯해 지금은 사라지거나 인기가 시들하지만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브랜드 로고를 직접 만들어 배우들에게 입혔다”고 말했다. 

1990년대 셔츠를 허리에 묶는 스타일과 대학생들의 필수품이었던 ‘잔 스포츠’ ‘이스트팩’ 가방을 착용하고 있는 ‘신사의 품격’ 주인공들.
SBS 제공
요즘은 간접광고를 피하기 위해 배우들의 의상에서 브랜드 로고를 가리지만, 이 드라마는 브랜드 로고를 일부러 노출한다. 브랜드 자체가 90년대 트렌드의 한 축이기 때문이다.

90년대 강남에서는 힙합스타일이, 강북에서는 몸에 착 달라붙는 복고풍이 유행을 주도했다. 강남의 힙합패션은 서구의 스트리트 스타일(길거리 패션)의 영감을 받은 반면 강북의 복고스타일은 한국 특유의 지역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했다.

여대생들 사이에서는 ‘고소영 바지’로 불렸던 통 넓은 청바지가 필수 아이템이었고, 페라가모 헤어밴드·페라가모 숄더백·페라가모 구두로 포인트를 준 일명 ‘이대 스타일’도 인기였다. 메이크업은 한 듯 안한 듯 투명 메이크업이나 눈매를 강조한 스모키 메이크업이 인기인 요즘과 반대로 90년대는 자신의 입술보다 크고 과장되게 립라인을 그리는 일명 ‘김혜수 메이크업’과 검붉은 립스틱을 바르는 ‘저승사자 메이크업’이 유행했다. 

청남방, 짝퉁 ‘게스’ 티셔츠 등 1990년대 대학생들의 패션 트렌드를 보여준 영화 ‘건축학개론’의 한 장면.
◆강남 강북의 경계가 무너지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강남스타일이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90년대 이후 인터넷의 확산과 SNS의 발달로 지역 간, 국가 간 경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한두 달 지나서 패션잡지에서나 볼 수 있던 해외 유명 브랜드와 디자이너 컬렉션이 인터넷에서 실시간 중계되고, 온라인 패션잡지와 패션 블로그, 디자이너 웹사이트를 통해 패션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된 덕분이다. 해외에서 유행하는 아이템은 온라인 구매대행이나 직구(직접 구매) 등을 통해 곧바로 살 수도 있게 됐다.

1990년대에는 청바지에 셔츠 앞부분만 집어넣는 스타일이 인기였다. 1994년 드라마 ‘느낌’의 한 장면.
KBS 제공
유재은 트렌드포스트 연구원은 “인터넷을 통해 패션 정보와 문화를 공유하면서 더 이상 지역 문화나 소득 차이로 패션 스타일을 양분할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글로벌 SPA 브랜드의 성장도 한몫했다. 자라·유니클로·H&M 등 저렴한 가격대의 글로벌 브랜드들이 경기 불황을 발판 삼아 서울 한복판부터 지방 구석구석까지 파고들면서 강남과 신촌, 서울과 부산, 도쿄와 뉴욕에서 같은 옷, 같은 액세서리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개성 강한 일본에서조차 글로벌 브랜드 위주로 구매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백화점 소비자, 명품숍 소비자, 동대문 소비자 등 경제수준에 따라 명확히 나뉘었지만 이제는 점점 명품숍부터 동대문까지 두루 활용하는 ‘크로스 구매’를 하는 소비자가 늘고 있다. 강남의 패션 리더들도 무조건 고가의 명품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신진 디자이너숍이나 다양한 브랜드의 옷을 모아 놓은 편집숍을 더 선호하는 추세다.

청 패션은 올해 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위 아래 컬러와 톤이 똑같은 청청패션은 1990년대 패션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갭(GAP) 제공
트렌드정보 컨설팅 기업인 PFIN의 유수진 대표는 “멀티 채널로 자유롭게 쇼핑하는 소비자에게 강남스타일, 강북스타일이란 있을 수 없다”며 “유니클로·자라·H&M에서 구입한 브랜드에 편집숍이나 작은 디자이너숍에서 구입한 소품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연출하는 창의적인 취향과 감각이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새로운 트렌드, 90년대 복고

90년대를 배경으로 한 대중문화가 인기를 끌면서 60년대, 70년대 복고에만 천착하던 패션계에서도 90년대 패션을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촌스러운 패션이 2012년 새롭게 재해석 혹은 재탄생하고 있는 것. 올해 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청(Jean) 패션이 대표적이다. 90년대를 풍미한 청남방, 청조끼, 청재킷, 상의 하의 모두 청 소재를 입는 ‘청청패션’ 등 청 패션의 부활이 눈부시다. 특히 셔츠와 팬츠의 컬러를 다르게 하는 청청패션이 아니라 같은 컬러, 같은 톤으로 상의와 하의를 통일시킨 90년대 청청패션이 그대로 유행하고 있다.

90년대에 한국에 처음 등장해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던 배꼽티는 크롭트 톱(Cropped Top)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 유명 디자이너들의 컬렉션에 종종 등장하고 있다. 셔츠나 속이 비치는 시스루 아이템과 겹쳐 입기도 한다.

90년대 힙합스타일과 더불어 인기를 끌었던 레이어드(겹쳐 입기) 스타일도 되살아났다. 긴 소매 티셔츠 위에 반팔 셔츠를 겹쳐 입는 레이어드 스타일은 힙합 패션에 주로 응용됐다. 체크셔츠에 니트 풀오버를 겹쳐 입는 스타일도 90년대 특유의 레이어드 패션이었다.

당시 스웨터나 셔츠를 어깨에 숄처럼 걸치거나 허리에 묶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최근 패션쇼에 종종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올여름 다소 길이가 긴 셔츠와 블라우스의 앞자락은 하의에 집어넣고 뒷자락은 빼는 스타일링도 90년대 크게 유행했었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