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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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도심에 출몰한 털복숭이 방랑자의 정체(영상)


크리스마스를 앞둔 회색 도시에 오랑우탄이 찾아왔다. 지하철도 타보고, 가로등도 짚어보고, 사람들과 셀카도 찍어보고, 성탄 트리 맨 꼭대기에도 올라봤지만 이 털복숭이 방랑자는 그토록 원하던 것을 찾지 못한 듯하다. 도시와 사람들이 빼앗아간 ‘자신의 집’을. 


지난 23일 영국 인디펜던트는 런던 도심에 출몰한 오랑우탄의 정체를 밝혔다. 천연덕스럽게 거리 곳곳을 누비며 시민들을 놀라게 한 오랑우탄은 사실 대형마트 체인 ‘아이슬란드’가 기획한 광고 캠페인의 일환이었다. 이 기업은 야심차게 준비한 크리스마스 광고의 TV 방영이 금지되자 항의의 뜻을 담아 이벤트를 기획했다. 



당초 아이슬란드가 크리스마스를 겨냥해 제작한 광고는 오랑우탄이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영상이었다. 국제 환경보호단체 그린피스가 제작한 이 영상은 한 소녀의 집에 사고뭉치 오랑우탄 ‘랑탄’ 이 들이닥치면서 일어난 소동을 그린다. 소녀는 랑탄을 쫓아내려 하지만, 그에게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돕기 위해 나선다. 랑탄의 집이었던 밀림은 팜유 생산업자들에 의해 파괴됐다.

팜유는 아이스크림에서 비누, 샴푸까지 다양한 공산품에 필수로 들어가는 재료다. 현대인의 삶에 없어선 안 될 존재지만 환경단체들은 팜유 농장을 만들기 위해 열대우림이 무분별하게 파괴되면서 오랑우탄과 같은 멸종위기종의 서식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광고 역시 하루에 매일 25마리의 오랑우탄이 사라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내 친구 랑탄을 구해주세요” 소녀의 외침은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광고의 송출을 결정하는 심의기관만큼은 끄떡없었다. 영국 TV광고 심의기관 클리어캐스트는 아이슬란드의 광고 방영을 금지했다. TV에 방영되기엔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이유였다. 기관 관계자는 "이 광고가 정치적인 조직으로 분류되는 그린피스에 의해 제작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정치적 광고는 영국 TV에서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방송 금지 처분’ 이후 광고는 오히려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명 방송인 제임스 코든은 트위터에 영상을 게재하며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TV에선 금지됐지만, 내 생각엔 우리 모두가 이걸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방영할 곳을 잃었던 광고는 온라인에서 1800만회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며 대히트를 쳤다. ‘이 광고의 방송 금지 처분을 철회하라’는 온라인 청원도 나와 27일 기준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다. 



예상치 못했던 폭발적인 반응에 놀란 아이슬란드가 화답의 의미로 마련한 것이 ‘오랑우탄 출몰’ 이벤트다. 이들은 실제와 똑같아 보이는 오랑우탄 기계를 준비해 런던을 누비게 했다. 길을 걷던 시민들은 모두 깜짝 놀라며 시선을 뺏겼다. 홀로 외로이 방황하는 오랑우탄의 표정을 본 이들은 그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고 이내 퍼포먼스가 담은 메시지를 깨달았다. 



아이슬란드와 함께 광고를 기획한 그린피스 활동가 엠마 톰슨은 "우리가 오랑우탄의 멸종을 막고 싶다면, 그들의 집을 지켜야만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슈퍼마켓에서 흔히 보는 많은 제품에 팜유가 들어간다는 사실을 꼬집어 대형마트의 광고를 제작한 계기를 밝혔다. 아이슬란드는 영국에서 유일하게 자체 상품에 팜유를 재료로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대형마트다. 오랑우탄을 지키고, 우리들 자신과 환경을 위해 더 나은 선택을 하자는 제안이 정말 ‘너무나 정치적’인 것일까? 



이아란 기자 aranciata@segye.com
사진 · 영상 = greenpeace, iceland, chang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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