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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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삶] 전남경찰청 박송희 여성·청소년 계장

학교폭력 근절 전도사로 왕성한 활동
“주위의 관심과 사랑이 문제해결 열쇠”
“야, 이제 너희들 다 죽었다. 이전 학교에서 전교 1등이었대.”

1984년 가을 전남 순천의 한 중학교 2학년 교실. 젊은 선생님이 한 여자 전학생을 소개했다. 아이들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 찼다. 영어시간이 돼 선생님이 ‘새 얼굴’을 지목하자 막힘없이 읽어 내려갔다. “너 영어 잘하는구나.” 선생님이 반색했다. 음악 선생님도 낯선 얼굴을 가리켰다. 전학생은 이전 학교에서 합창단 출신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선생님이 박수를 쳤다.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튿날부터 전학생 주변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혼자 쉬고 혼자 도시락을 먹었다. 체육시간에도 파트너를 하겠다는 친구가 없었다.

전학 하루 만에 ‘투명인간’이 됐다. 따돌림 뒤에는 지금의 ‘일진’ 격인 학생이 있었다. 그 친구는 공부를 잘하고 얼굴도 예뻤다. 집안까지 부유해 친구들이 많이 따랐다.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흉폭한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가족과 학교, 친구가 세상의 전부인 학생에게 친구들의 따돌림은 삶의 한 부분이 무너지는 절망이었다. 뚜렷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날 아침, 학생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흘을 연이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지막 날은 전학 오기 전에 살던 고향의 한 저수지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저수지 둑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엄마 생각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박송희 전남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 계장이 지난 12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학교폭력에 대한 신념을 밝히고 있다.
이제원 기자
◆28년간 묻어둔 이야기


28년이 흘렀다. 이 여학생은 전남지역 학교폭력 실무를 총괄하는 경찰이 됐다. 박송희(43) 전남지방경찰청 여성·청소년계장(경감)이다. 박 계장을 12일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만났다.

그는 이날 김황식 국무총리와 장관급 정부위원 10명이 참석한 ‘학교폭력대책위원회’ 2차 회의에서 경찰 대표로 우수 대응 사례를 발표했다.

자살을 결심할 만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렸던 경험 때문일까. 평소 박 계장의 발표나 특강에는 혼신을 다해왔음이 느껴진다. 이날 김 총리도 “일선 경찰관들의 열정에 감사드린다. 제 마음을 꼭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앞서 이달 초 경찰청에서 열린 전국 지방청 학교폭력대책 추진성과 평가회에서는 특진 티오(정원)를 놓고 경쟁 관계인 타 지방청 관계자들의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

박 계장이 자신의 경험을 입 밖에 내놓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개월여 전이다. 지난해 8월 전남권 교장 830여명이 참석하는 행사에 학교폭력 관련 특강을 요청받았다. 박 계장은 “그 많은 어른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척 고민했다”며 “그 일을 꺼내서라도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자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그날 박 계장은 경찰의 노력을 약속하면서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선생님들이 가슴으로 다가가 보살펴 달라’고 호소했다. 교장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박수를 쳤다.

‘교사의 역할을 왜 그렇게 강조하나’. 박 계장은 저수지를 다녀온 날, 담임 선생님이 집을 찾아왔다고 했다. 놀란 어머니와 선생님 앞에서 그간 벌어졌던 일들을 털어놨다. 시작은 선생님의 소개였다는 말에 담임은 말문을 잇지 못했다. 이튿날,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용서를 구했다. “선생님의 경솔한 행동이 너희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약속해라. 아니면 내가 죽어야겠다.” 웅성이던 학생들이 훌쩍거렸다. 따돌림을 주도한 친구가 박 계장에게 사과했다. 다행히 곧 학년이 바뀌고 새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됐다. 박 계장은 “지금도 그 일을 언급하면 코끝이 맵다”며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있다”고 털어놨다.

◆학교폭력, 누가 가해자인가

학교폭력은 가·피해자의 경계가 모호한 범죄다. 어제의 가해자가 오늘의 피해자가 된다. 대상을 바꿔가며 폭력을 가하는 특성 탓이다. 가해자가 또 다른 폭력의 피해자인 경우도 숱하다. 그래서 학교폭력은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박 계장이 한 사례를 들려줬다.

최근 한 체육고등학교에서 선배 한 명이 후배 11명을 중학교 때부터 4년에 걸쳐 폭행하고 수백만원을 갈취했다가 경찰에 적발됐다. 행위로만 봐서는 구속감이었다. 피해자가 다수인 데다 오랜 기간 지속됐고 피해액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해자 A군은 체육 꿈나무였다. 게다가 조사 결과 부모가 이혼한 조손가정으로 생계를 어렵게 이어가고 있었다.

박 계장은 “경찰도 고민에 빠졌다”고 말했다. 우선 피해자 부모를 차례로 만나 사정을 이야기했다. A군 친모에게는 피해금을 물어내도록 설득했다. 그런 뒤 A군이 후배들과 그 부모 앞에서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박 계장은 “가장 강경했던 부모가 끝내 눈물을 흘리며 바닥에 엎드려 있던 A군을 일으켜 세웠다”며 “다들 A군이 그렇게 힘들게 운동을 해온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후배들도 ‘죽일 것만 같았던’ 선배의 그런 모습에 응어리가 풀렸다.

피해자 측이 모두 선처를 요구해 사건은 불구속 입건에서 마무리됐다. 이후 피해자 부모들은 A군에 대한 후원을 약속했고, A군은 최근 열린 전국체전에서 3위에 올랐다. 체육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좋은 성적이다.

이처럼 학교폭력은 섬세한 대응을 요구한다. 강력계 형사들도 “차라리 성인 범죄를 한 건 더 하겠다”고 말하곤 한다. 박 계장은 “학교폭력에는 사소한 게 있을 수 없다”며 “2차 피해도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떠올리기 싫은 제 기억을 꺼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은, 어른들이 이 같은 학교폭력의 특수성을 유념해 달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학교폭력, 가정에서 시작된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관심, 그리고 사랑입니다.” 박 계장이 한 단어씩 힘을 줘 말했다.

그는 “아이들은 반드시 변한다”고 했다.

박 계장은 최근 둘째아들(13)의 학교에서 강의한 이야기를 꺼냈다. 속칭 ‘일짱(일진들 가운데 가장 싸움을 잘하는 학생)’이 속한 반에서였다. 학교 측은 해당 학생을 맨 앞줄에 앉혔다. 경찰 정복을 입고 교실에 들어선 박 계장은 어떤 행동이 학교폭력이고, 피해자의 고통은 얼마나 심각하며, 가해자에게는 얼마나 엄한 처벌이 가해지는지 등에 대해 2시간가량 강의했다.

그리고 강의 내내 눈을 맞추고 머리를 쓰다듬었던 ‘일짱’ 학생의 손을 잡았다. “친구들한테 나쁜 일이 생길 때 네가 지켜주면 좋겠다.”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들은 박수를 쳤다. 박 경감은 “이후 선생님이 반 분위기가 바뀌었다며 무척 좋아했다”고 말했다.

특히 아들은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줬다. ‘일짱’ 학생이 “너네 엄마는 왜 그렇게 사람을 만지냐”고 했다는 것. 박 계장은 “놀란 아들이 ‘싫었냐’라고 묻자 ‘아니, 기분은 좋더라’라고 답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은 꾸준히 스킨십을 해주고 눈을 맞추면 어느 순간 경계를 푼다”며 “세 번만 손을 잡아도 눈빛이 바뀐다”고 강조했다.

박 계장의 초등학교 때 꿈은 ‘엄마’였다. 꿈을 엄마라고 써내면 친구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경찰관은 상상도 못했던 직업. 그는 이 일을 하면서 ‘혹시 그때 그 꿈이 이렇게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한다며 웃었다. 고통받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네 엄마가 돼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학교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고 새로운 대책을 마련한 것도 없다고 했다. 기존에 해왔던 예방과 사후관리를 더 내실화했다는 설명이다. 박 계장은 “예전에는 조사하고 끝났다면, 이제는 틈날 때마다 전화해서 힘든 일은 없는지 체크한다”며 “그게 핵심이고, 경찰은 더 할 수 있는 일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학교폭력은 뿌리가 깊은 범죄다. 근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가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박 계장은 “학교는 집에서 형성된 인격이 재사회화되는 곳일 뿐이다”며 “가정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안이한 생각과 대응이 학교폭력을 키운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