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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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미의 짜이 한 잔] 자연을 닮은 아이들 미소… 따뜻한 기억만 한아름

<4>별빛이 예쁜 마을 , 팅그리


팅그리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을 따라 언덕 위로 올라갔다.
라싸를 떠나기 위한 차가 준비됐다.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된다. 최종 목적지는 네팔이다. 버스가 있지만 겨울에는 운행하지 않는다. 차로 가면 도중에 다른 마을에도 들를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아침에 출발해서 한참을 달렸다. 
구불구불해도 한 길로 나 있는 길은 선택이 필요 없이 그 방향으로만 나아가면 된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시간에는 눈을 뜨기조차 힘들다. ‘시가체’라는 마을에 들어설 때쯤에는 안개가 끼어서 그나마 햇빛을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앞을 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시가체에 들어서자 폐허가 된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안개가 자욱해서 멀리까지 보이지 않았다. 바람 탓에 모래와 먼지 그리고 쓰레기가 뒹굴었다. 대부분 가게는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띄엄띄엄 있는 사람들은 마치 영화의 슬로모션 장면처럼 움직였다. 영화 ‘사일런트 힐’이 생각나서 오싹하기도 했다. 다른 세계로 들어선 것처럼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점심을 먹기 위해 들른 이름 모를 작은 마을은 말들이 모이는 곳이다.

운전사만이 길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가 안내하는 곳에서 머물러야 한다. 물론 마음에 안 들면 다른 곳에 데려간다. 하지만 이런 마을에서는 어디를 가나 비슷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별 불만 없이 지내야 한다. 배부르게 먹는 게 아니라 배고픔을 잊게만 해주면 되고, 편안하게 자는 게 아니라 지붕 있는 곳에서 바람만 피해서 자면 된다.
한없이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자처한 고행을 행한다.
티베트에서는 절제된 삶을 배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그 절제된 삶이 좋았다. 모든 것에서 풍요가 아니라 최소한만 추구한다. 절제가 되면 생각도 간결해지고, 볼 수 있는 것도 명확해진다. 

다음 날, 도착한 곳은 ‘팅그리’라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에는 숙소도 식당도 고를 수 있는 사치 따위는 없다. 한 군데서만 머물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다. 숙소는 폐교를 쓰고 있는 듯했다. 복도에 작은 방들이 있고, 그 방안에 침대 두세 개가 있다. 다른 팀이 도착해서 이곳을 보더니 당장 떠나버렸다. 이곳을 지나치면 다음 마을까지 하루에 도착하기 힘들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야 다음 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그 팀은 이 숙소에 차마 머물 수가 없었나 보다. 
팅그리 마을에서 만난 아이들.

나는 오히려 팅그리라는 마을이 마음에 들었다. 저녁 해가 지기 전 마을을 돌아다녔다.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흙바닥에 뒹굴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가는 곳을 따라갔다. 흙산을 올라보니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흙산에 흐르는 초록색 물이 어색하면서도 잘 어울린다.
마침 그 뜨겁던 태양이 서서히 대지 아래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흙은 더 붉게붉게 물들었다. 독수리가 뱅뱅 도는 그 언덕 위에서는 내가 보는 것들이 더 명확히 보였다. 붉은 노을이 끝나갈 즈음에 아이들이 내려가자고 했다. 
산 위에서 만난 야크는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어렸을 때 나도 해가 다 지고 나면 놀고 있던 친구들과 급히 집으로 뛰어들어가곤 했다. 팅그리 마을에도 이 법칙은 존재했다. 마을로 내려가니 집집마다 따뜻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녁밥을 먹으러 모두 집으로 속속 들어가버렸다. 나는 갈 곳 없는 아이처럼 마을을 돌아다니다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도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난로 하나를 피워놓고 그 앞에 옹기종기 모두 모여 있었다. 따뜻한 온기라고는 그 난로 하나가 전부였다. 난로 안에 넣는 연료는 야크똥이다. 배고픔을 잊게 해주는 음식을 가져다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난로 위에 끓이고 있는 물로 양치질만 대충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3학년 6반 교실 느낌이 나는 방에는 난민수용소에나 있을 법한 간이침대가 놓여 있다. 입김이 나는 게 밖이나 이곳이나 비슷했다. 
짱족이라 불리는 티베트인들은 키가 크다.

방 안에 있는 것보다는 같은 추위라면 별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밖이 낫겠다 싶어 나가봤다. 추위가 매몰차게 몰아치지만 저 하늘 위로는 움직이지도 않는 맑은 별들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밤하늘 별들이 쏟아진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생각하며 추위를 녹일 별빛을 받았다. 폐교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전기가 나가서 촛불을 켜 놓았다. 전기가 나가기 전까지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 아주 작은 텔레비전을 봤다. 가장 놀라운 건 이런 산골 마을에도 한국 드라마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몇 년이 지난 예전 드라마이긴 하지만, 눈물을 흘리면서 보고 있는 사람들이 좋았다. 화면이 지지직거려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모두가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텔레비전 속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화면 밖 사람들을 보면서 온기를 느꼈다.
 
팅그리 마을 작은 집, 작은 창문으로 보이는 달빛은 전깃불보다 더 환하게 비춘다.

추워서 그런지, 음식 때문이었는지, 어쨌든 이런 곳에서는 꼭 탈이 난다. 아직은 이런 것까지 버틸 만한 면역력이 없다. 복통에 시달리다 잠에서 깨 화장실을 갔다. 화장실은 무서운 복도 끝에 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작은 운동장을 지나서 가야 한다. 만능칼 뒤에 달린 작은 불빛을 켜야 겨우 시야를 가늠할 정도였다. 화장실이 급하면 무서움도 잊나 보다. 운동장을 가로지르고 있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그 작은 불빛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꺼버렸다. 별이 내 위에서 지켜주고 있었고, 그 고마움에 난 그 화장실을 두 번이나 더 갔다 올 수 있었다. 춥고 몸이 아프고 모든 것이 힘들었겠지만, 그런 것들이 대수롭지 않았다. 별이 아름다운 팅그리에서는 좋은 기억만 남았다.

아침 6시에 출발하기로 했지만, 더 일찍 출발했다. 새벽에 몰아닥친 추위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몸서리치게 추웠고 아팠지만, 팅그리는 따뜻한 기억이 더 많이 남는다. 
설산이 보이는 산들을 넘고 넘어서 간다.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며칠째 하고 있었지만, 전혀 익숙해지지 않았다. 절벽 위를 달리는 차, 비포장도로를 달릴 때의 덜컹거림, 이 모든 것은 익숙해질 수 없는 것들이다. 풍경 또한 익숙해질 만도 한데, 볼 때마다 한없이 낯설고 만나는 것마다 새롭다.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가 보이고, 빙하가 녹은 물은 초록빛이 난다. 
파란 하늘에 하얀 설산은 구름인지 의심스럽기만 했다. 하얀 설산에 펄럭이는 오색천은 소원을 담아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초모랑마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내 소원도 저 오색천에 담아 하늘로 올려보냈다. 
티베트인들의 소원을 담은 오색천은 바람을 통해 하늘에 닿는다.

여행작가 grimi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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