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에 대한 정보도 없이 도착해서 일단은 가트로 향했다. 가트는 갠지스강가 돌계단을 의미한다. 그 안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건물들 사이사이에 숙소가 많다. 바라나시에서의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이곳에 빨리 오고 싶었을 뿐이다.
바라나시 지도. |
날이 어두워질 무렵 가트에 들어섰다.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일조차 쉽진 않았다. 몰려드는 숙소 호객꾼들을 뿌리치고 골목길로 들어섰다. 숙소는 많았지만, 대부분 빈방이 없어서 무거운 배낭을 메고 한참을 헤맸다. 그때, 한국말이 반갑게 들려왔다. “한국 분이시죠?”라고 말한 사람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녀를 따라서 숙소 몇 군데를 들렀지만, 역시 빈방이나 빈 침대를 구하기는 힘들었다. 그녀는 오늘 잘 수 있는 곳은 한 군데밖에 없을 거라며 자신이 알고 있는 숙소에 데려다 줬다. 하루만 이곳에서 묵고 내일 아침에 다른 곳을 알아보라는 것이다. 일본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숙소였다. 아무리 잘 곳이 없어도 침낭 하나만 있으면 재워주는 곳이었다. 침낭을 깔고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사이에 나도 침낭을 펼쳐 내 자리를 만들었다. 고된 하루를 침낭 하나만큼 주어진 공간에서 마무리했다.
바라나시 갠지스강에는 삶과 죽음이 섞여 있다. |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를 따라 줄지어 선 가트 모습. |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올라간 옥상에서는 갠지스가 보였다. 갠지스에는 6㎞에 달하는 가트가 줄지어 있다. 이름이 각각 다른 80여개의 가트다. 그중에서 메인가트라고 불리는 다샤스와메드 가트와 마니카르니카 가트는 큰 화장터로 유명하다. 메인가트에서는 매일 저녁 힌두교 의식인 푸자(Puja)가 이뤄진다.
뿌자를 위해서 꽃을 준비한다. |
갠지스에 대해서만큼은 이들에게 뿌리 깊은 믿음이 존재한다. 그곳에서는 삶과 죽음이 한곳에 뒤엉켜 있다. 어쩌면 두 가지는 같은 의미인지도 모른다. 죽음이 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작일 수도 있고, 삶이 시작이 아니라 끝으로 향함일 수도 있다. 죽기 위해서 이곳에 온 사람들은 화장터로 향해서 재가 되어 갠지스에 뿌려진다.
빨래하는 여인 모습. |
하지만 모두가 이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 몇 가지 경우에는 죽은 육신을 배에 싣고 가서 갠지스 물 위에 띄우기도 한다. 그렇게 죽음이 흩뜨려놓은 물가에서 목욕하고, 그 물을 마시기도 한다. 물가에는 빨래터도 존재한다. 모든 것을 수용해주는 갠지스가 끈덕지게 물결친다. 가벼운 물이 아니라, 많은 것을 담아 놓아서 그 무게에 눌려버린 것처럼 무겁게 흐른다.
꽃을 파는 아홉 살 꼬마에게 꽃을 하나 샀다. |
숙소 앞 가트에 앉아서 이런 생각들을 하니 벌써 해가 사라지고 있었다. 바라나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도움을 준 한국 사람을 또다시 만난 것은 그때였다. 그녀는 인도에서 9개월째 체류해 여행자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름보다는 ‘알루’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알루는 힌디어로 감자라는 뜻인데, 그 별명이 잘 어울렸다. 알루는 “푸자를 보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실래요?” 하면서 말을 걸어왔다. 아무 말 없이 메인가트까지 걸어갔다. 빼곡히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알루가 사라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푸자는 해가 질 때쯤 이뤄진다.
뿌자는 힌두교 의식으로 매일 이뤄진다. |
나도 갠지스강 위에 소원을 담아 꽃을 띄웠다. |
그 다음날 새벽, 해가 뜨기 전에 갠지스 가트로 나갔다. 새벽부터 짜이를 끓이기 시작하는 이가 있다. 짜이 한 잔을 부탁하고 가트에 앉아 기다렸다. 어둡기만 하던 갠지스에서 갑자기 해가 떠오른다. 그것은 갠지스가 해를 품고 있다가 내뱉기라도 하듯이 이뤄졌다. 농도가 짙어서 물컹거리는 느낌이 드는 짜이와 갠지스가 닮았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은 마치 갠지스가 품고 있던 해를 내뱉은 듯하다. |
여행작가 grimi7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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