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여행] 그들은 10시간째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주미의 '짜이 한 잔'〈10〉 인도 기차에서 배우는 상대적인 시간
기차역 플랫폼에서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다.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Khajuraho)를 가기 위해 기차역에서 표를 예매했다. 사람이 많을 때는 기차표를 예매하는 일이 전쟁처럼 이뤄진다. 다행히 카주라호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고, 대도시도 아니어서 좌석이 넉넉했다. 다음날 인도 기차의 고질적 문제인 ‘연착’을 몸소 체험했다. 사실 바라나시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모든 기차는 연착이 일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특별히 내가 타는 기차만 연착이 되는 건 아니다. 연착된 기차가 들어올 때 플랫폼 번호가 바뀌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안내방송은 힌디어로 나오는데,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도 눈치를 봐서 사람들이 이동하는 걸 보고 따라가면 된다. 일단 기차역에 도착하면 표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확정된 좌석을 확인해야 한다. 당일에 이름이 인쇄된 종이가 역 벽면에 붙는다. 기차표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어서 몇번을 확인해야 한다. 빼곡히 쓰여 있는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렵진 않다.

역시나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러도 기차가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자리를 펴고 바닥에 앉았다. 누구에게 가서 물어보거나 항의할 필요도 없다. 인도에서 기차 연착이란 당연한 것이라 이해하고, 그 시간을 즐겨야 한다. 언제 올지 모를 기차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책이라도 읽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언젠가는 꼭 올 기차를 느긋하게 기다려야 한다. 배낭에 몸을 기대고 편안하게 쉬면서 책도 읽고 군것질도 하면서 있었는데,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바닥과 벽면 틈에 난 작은 구멍으로 쥐 가족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덩치가 큰 쥐가 사람들 사이로 흘러들어 가서 먹을 것을 갈취해 물고 그 구멍으로 들어갔다. 구멍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쥐들이 많았다. 새끼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쥐 가족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따뜻한 가족애도 느끼고, 그러다 잠깐 졸기도 했다. 꿈에서 쥐구멍으로 들어갔더니, 그곳에는 쥐들이 집을 예쁘게 꾸며놓고 나를 환영해주었다. 눈을 떠서 쥐구멍을 보니, 여전히 쥐들이 있었다. 꿈을 더 꿨다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도 될 뻔했다. 이곳이 인도이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은 바라나시 기차역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겼다. 바라나시는 끝까지 나에게 환상과 현실을 헷갈리게 하는 곳이다. 바라나시를 떠나는 일조차 쉽지 않다는 걸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평화로운 바라나시의 기차역 풍경.

5시간 이상 연착되는 기차는 기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계속 물어봤다. ‘왜 안 오는지, 언제 오는지, 오기는 하는 건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묻고 물었다. 사람들은 시계를 보는 척하면서 온다는 희망만 얘기해줬지, 다른 답변은 주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나만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다 함께 기다려야 한다. 그 시간을 나만 초조하게 보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포함한 외국 여행객만 그러고 있었다. 인도인들은 자기 할 일을 하면서 심지어는 여유까지 보이면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안개가 잦은 이 지역에서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면, 열 시간은 연착될 수 있다는 예측 정도는 해야 했다. 


마음 편히 기다리기를 10시간이 넘어가서야 기차가 도착했다. 기차가 도착하기 얼마 전부터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기차가 도착하면 어디서 나타난 사람들인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이들로 기차가 꽉 들어찬다. 짐만 보내는 사람들, 먹을거리를 파는 사람, 나 같은 여행자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짜이를 파는 사람들까지 플랫폼과 기차 안을 채웠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서 침대칸 말고 가장 낮은 등급인 좌석을 선택했다. 뚫려 있는 창문 덕분에 덥지는 않았지만, 문제는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바람이 춥다는 것이다. 기차표에 명시되어 있는 시간보다 10시간이 늦어도 꼭 도착은 하는 이 기차처럼 힘든 일도 반드시 지나간다. 다음날, 카주라호에 도착한 나를 보면 모든 일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같이 지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일들도 언젠가는 지나간다.
기차 안 창문은 유리가 없다. 불어오는 바람을 몇 시간 맞으면 춥다.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까지 얼마가 걸린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거리상으로는 400㎞ 정도 되지만, 시간으로 대략이라도 알 수가 없다. 10시간이면 올 줄 알았던 카주라호를 나는 하루가 걸려서 도착했다. 버스로 간다면 정확할 것 같지만, 그것도 인도에서는 알 수가 없다. 택시를 전세내서 가는 게 그나마 정확한 시간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은 배낭여행자는 대부분 기차를 선호한다. 어쩌면 모험처럼 기차를 타기도 한다. 인도에서 기차를 타는 일은 단순히 이동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삶에서 필요한 몇 가지를 배우게 해준다. 특히 인내심에 훌륭한 수업이 된다. 빠르게만 살았던 도시 속 삶에서는 10분 연착이라는 말도 상당히 크게 느껴진다. 10시간 연착이라는 말이 흔하게 느껴지는 인도와의 이 대비 감은 어떤 의미일까. 10분도 10시간도 상대적인 시간에서 본다면 같은 시간일 뿐이다. 



기차에서 내린 후 버스로 갈아타서 도착한 곳이 카주라호다. 
버스 모양도 예쁘게 느껴진다.


카주라호에 발을 내디디며 깨끗하다고 느끼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바라나시에서 왔기 때문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카주라호도 길거리에 파리떼가 진을 치고 있고, 음식을 시키면 파리가 먼저 식사를 하는 곳이다. 

카주라호 마을의 작은 가게.
하지만 몇 군데만 소 배설물이 있고, 나머지 길은 맨발로 다녀도 될 만큼 깨끗하다. 

깨끗한 카주라호의 거리.
숙소를 찾아 일단 씻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한 시간도 안 돼서 다시 씻어야 할 만큼 땀을 흘리고 들어왔다. 

카주라호는 바나라시에 비해서는 아주 깨끗한 마을이다.
덥다는 말로도 이 상황이 표현이 안 된다. 카주라호는 성적인 묘사가 많은 오래된 석상으로 유명하다. 처음 이틀은 이 석상을 보러 갈 엄두가 안 나서 쉬기만 했다. 뜨거운 햇살을 이겨내기 위해 일단은 쉬면서 체력을 보충했다. 석상은 다음 날 보러 가기로 했다.
멀리 보이는 석상을 내일은 보러 가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바라만 봤다.

여행작가 grimi79@gmail.com

<세계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