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김현주의 일상 톡톡] '88번의 정성' 들인 한 톨의 쌀… 풍년의 역설에 운다

황금 들녘을 바라보면 지나가는 과객조차도 저절로 마음이 풍성해진다. 하물며 ‘88번의 정성’을 쏟아가며 이른 봄부터 땀을 흘려 온 농부들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싶다. 가을까지 이어진 극심한 가뭄을 견뎌내고 누렇게 여물어가는 낱알을 보면 어깨춤이 들썩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풍년이라도 마냥 흥이 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공급과잉으로 가격이 하락하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기 때문. 때론 가격을 지지하기 위해 농민들이 자식처럼 키운 농작물을 제 손으로 폐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벌어진다.

이른바 '풍년의 역설'이다. 농사가 잘 돼도 걱정, 흉년이 들어도 걱정인 게 농촌의 현실이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혼아 담겨 있다는 대표적 주식인 쌀이 그렇다. 올해 재배면적이 꾸준히 줄어들고 있는데도 쌀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농민들이 다시 한번 '풍년의 역설'을 걱정하게 됐다. 기존 재고량까지 고려하면 쌀은 넘쳐나는데 소비량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라 가격 하락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재고 처리에 고심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쌀 예상생산량은 425만8000톤으로 전년(424만1000톤)보다 0.4% 늘어날 전망이다. 재배면적은 2.0% 감소했지만 10a 당 생산량이 2.5% 늘어 전체 생산량이 1만7000톤 증가하는 것이다.

재배 면적은 최근 10년간 계속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재배 면적은 ▲2005년 98만ha ▲2006년 95만5000ha ▲2007년 95만ha ▲2008년93만6000ha ▲2009년 92만4000ha ▲2010년 89만2000ha ▲2011년 85만4000ha ▲2012년 84만9000ha ▲2013년 83만3000ha ▲2014년 81만6000ha ▲2015년 79만9000ha의 추이를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올해는 병충해와 풍수해가 없어 벼의 생육이 양호해 생산량은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통계청은 "가지 치는 시기와 낟알이 형성되는 시기의 기상 호조로 유효 분얼수가 많아 1㎡당 낟알수가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는 올해 예상생산량 발표에 따라 '2015년 수확기 쌀 수급안정 추진방안'을 마련한다. 미곡종합처리장(RPC) 등 벼 매입능력을 확충하고 밥쌀용 수입쌀 관리 강화, 정부 재고 처리 대책 등을 검토한다는 것이다. 시장격리 등 추가 대책도 거론되고 있다.

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쌀 소비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매해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통계청이 올 초 발표한 '2014년 양곡소비량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한 사람이 소비한 쌀은 65.1㎏으로 전년 67.2㎏에 비해 2.1㎏ 줄었다. 이는 쌀 소비량이 가장 많았던 1970년 136.4㎏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먹거리가 풍부해져 굳이 탄수화물로 배를 채우지 않아도 되는 시대인데다,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탄수화물을 적게 먹게 된 것이 쌀 소비량 감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빵이나 파스타 등 서양의 식습관이 우리 국민의 식생활에 깊숙이 파고들고 라면 등 인스턴트 식품이 보편화된 것도 우리 국민이 쌀밥을 적게 먹게 된 하나의 원인이다.

이처럼 소비 환경이 변했다면 전략도 바뀔 필요가 있다. 양곡소비량 조사에 따르면 쌀 소비량은 매년 감소하고 있지만 사업체부문은 전년 대비 1.7% 증가했다. 즉, 쌀 소비 감소의 돌파구를 가공산업에서 찾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부는 최근 쌀 가공산업을 다양화·고급화·차별화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육성시키도록 하는 '쌀 가공산업 활성화 방안'을 내놓은 바 있다. 특히 글루텐은 밀이나 보리에 들어있는 식물성 단백질의 혼합물로 밀가루 반죽을 쫄깃하게 하고 빵을 폭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만, 일부 사람에게 알레르기 반응이나 소화 장애 등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있다.

때문에 최근 글루텐 프리 제품이 주목을 받고 있는데, 정부도 쌀을 '글루텐 프리' 상품으로 내세우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시장에 국내 쌀 가공업체가 진출할 수 있도록 해외 글루텐프리 인증을 획득하도록 지원할 방침이다. 글루텐 프리 식품은 글루텐 민감성 소비자뿐 아니라 웰빙을 추구하는 소비자까지 요구가 확대되는 추세로, 세계 시장은 2016년 265억달러까지 성장할 전망이다.

아울러 떡이나 막걸리 정도에 쓰였던 가공용 쌀의 활용 분야가 면이나 디저트 등으로 넓어지고 있다. 밥쌀 소비가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상황에서 쌀 가공식품은 소비자들에게 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쌀 소비를 촉진할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쌀 가공산업 매출액은 4조1775억원이다. 전체 식품산업 매출액의 2% 수준이지만 2008년(1조8000억원)과 비교해 시장 규모가 133.3% 증가했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빠르다.

분야별 매출액 비중은 떡류 제조업이 33.3%로 가장 많으며, 이어 도시락·식사용 조리식품 등 밥류 제조업(31.9%), 막걸리 등 주류(19.7%) 순이었다. 아직 과자(1.2%)나 면류(0.7%) 등은 매출 규모와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앞으로 성장할 분야로 주목받고 있다.

쌀로 만든 면은 떡 느낌이 나는 특유의 식감 때문에 인기가 없었지만, 최근 파스타 등으로 쌀면 제품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다. 아워홈은 올 초 ▲쌀파스타 조개크림소스 ▲쌀볶음면 ▲쌀짜장면 등 쌀을 활용한 면 요리 제품을 내놓았다. 풀무원도 쌀 파스타면을 넣은 '부드럽게 쫄깃한 쌀면 페투친메', 쌀 생면으로 만든 '부드럽게 쫄깃한 쌀면 매콤물비빔면'를 출시했다. 밀가루를 넣지 않고 쌀·옥수수·감자 등 곡물 전분을 배합해 면을 만들었다. 쌀로 만든 면의 단점인 떡 같은 식감을 보완하고자 쌀가루를 물에 섞어 얇게 편 뒤 건조·숙성시켜 잘라 만드는 제면법을 도입했다.

젊은 층이 선호하는 디저트 메뉴에도 쌀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빙수로 유명한 한국식 디저트 전문점 설빙은 최근 우리쌀로 만든 '누룽지 설빙'을 출시했다. 빙수에 우리쌀로 만든 누룽지와 라이스칩을 올리고 쌀 조청으로 맛을 냈다. 설빙은 지난 9월 농식품부,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과 서울 우리 쌀 소비 촉진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고 쌀 빙수 등 쌀로 만든 디저트를 팔기로 했다.

앞서 농식품부는 전문 요리사와 협업해 ▲쌀크레이프 ▲쌀케이크 ▲흑미와플 ▲누룽지스콘 등 쌀 디저트 7종을 개발, 쌀박물관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농식품부는 쌀 가공식품 소비를 촉진하려는 취지로 올 연말까지 청와대 사랑채 쉼터에서 쌀 가공식품 전시회도 연다.

쌀빵과 쌀파스타 등 쌀로 만든 가공식품 34종을 전시하고 일부 제품을 판매한다. 매주 금요일에는 사랑채 한식체험관에서 쌀 가공식품 시식회가 열린다.

간편 식품을 선호하는 1∼2인 가구와 맞벌이 증가에 따라 다양한 쌀 가공식품 수요가 많아져 가공용 쌀 소비는 점점 늘어날 것으로 농식품부는 전망하고 있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