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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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삶 안녕하십니까] 외로워도 참고, 아파도 참고, 그리워도 참고

[연령대별로 본 ‘행복과 불행’] (19) ‘마음의 병’ 시달리는 노년 / 우울증 환자 10명 중 4명이 노인… 혹시 우리 부모님도?
‘늙은이들은 외로워도 참고, 아파도 참고, 그리워도 참고 살지…(중략)…늙은이들은 그렇게 슬픔에 갇혀 겨우 숨을 쉬지. 하지만 그 슬픔에서 해방되어 새로 시작할 무엇도, 심지어 슬픔을 깨달을 자각력도 마비돼 있어’ 김원일의 소설인 ‘슬픈 시간의 기억’의 주인공 김씨는 양로원에 홀로 남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노년의 우울한 삶의 풍경은 비단 소설 속 풍경만은 아니다. 고령화시대가 깊어가면서 노년의 우울증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고 있다.

◆전체 우울증 환자 10명 중 4명은 노인


서울 종로에 사는 박금자(70·여)씨는 거의 온종일 TV 앞에서 지낸다. 딱히 TV를 시청하는 것도 아니다. 자녀들과의 만남이 연례 행사가 돼버린 박씨는 집에 틀어박힌 채 자녀들의 전화만 기다리고 있다. 박씨는 “집에만 있으니 가슴이 짓눌리는 듯이 답답하고 이따금씩 외로움과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얼마 전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평소 서울 정릉천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게 소일거리인 김탁호(84)씨는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뭔가 하자니 두렵다”고 입을 열었다. 그는 “주변 친구들은 자식들과 여행도 자주 가는 것 같고 즐겁게 사는 것 같은데 난 하루종일 집 근처 정릉천만 오간다”며 “쓸쓸하고 답답한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이어 “지금은 집사람이 있으니 밥도 챙겨주고 하지 집사람이 떠나면 애들 집에서 눈칫밥 먹기도 힘들고 어떻게 될까 겁이 난다”고 토로했다. 김씨 역시 병원에 건강검진을 받으러 갔다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18일 이목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연령별 우울증 현황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우울증으로 병원을 찾은 환자들 중 60대 이상 노인은 25만1945명으로 집계됐다. 전체 우울증 환자(60만9469명)의 41%에 육박하는 수치다. 노인 우울증 환자는 해마다 증가 추세다. 2010년 9만6722명이었던 60대 우울증 환자는 지난해 10만9079명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70대 우울증 환자는 7만8261명에서 10만7272명으로, 80대 이상 우울증 환자는 2만833명에서 3만5594명으로 증가했다.

이풍훈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주임 연구원은 “노인의 증가와 핵가족화, 이른 퇴직으로 사회와 단절돼 노인 우울증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면서 “노인 우울증이 극단적인 자살로 이어지는 등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만큼 각별한 관심과 정책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신도 우울증 환자일 수 있습니다’


노인 우울증이 사회 문제로 대두했지만 여전히 노인들은 우울증을 부끄러워하거나 질병이 아닌 간단한 증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은 오순자(71)씨는 주변에서 우울증을 앓는 친구들이 몇몇 있다는 이야긴 들었지만 본인이 우울증 환자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오씨는 “남편이 지난해 암으로 숨진 뒤 손자들도 보면서 잘 살았다”며 “지금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 시간이나 쉴 때 뭔가 하는 것 없이 외롭고 적적했던 게 우울증이었구나 싶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우울증에 무감각해 본인이 우울증에 걸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노인 우울증은 신체적 질병, 재정적 어려움 등 다양한 사회적 요인에 의해 생기기 쉬운 질병이다. 대체로 외로움, 심리적 불안감, 소외감 등을 동반한다. 여러 증상과 함께 나타나는데 노화, 질병 등의 이유로 생긴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온몸이 쑤시는 등 근육통이 생긴다. 또한, 기억력과 집중력이 저하돼 증상이 마치 치매처럼 보이기 쉽다. 노년기에 우울증이 오면 매사에 집중하지 못하고 금방 본 것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 우울증은 치매의 초기 증상인 시공간능력파악장애, 계산착오 등을 보이지 않아 구분할 수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노인 우울증 자가 진단표(그래픽 참조) 항목 중 8개 이상에 해당되면 전문의와 상담이 필요하다.

이목희 의원은 “60대 이상인 베이비붐 세대 대다수가 은퇴 후 자식교육 등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있다”며 “우울증은 조기 치료를 통해 간단히 극복할 수 있는 질환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건호 기자 scoop3126@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