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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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삶의 판타지 ‘킨포크 스타일’

열병같은 유행이 개성을 앗아가
소박함의 로망이 이젠 사치일 뿐
최근 인스타그램 스타인 ‘에세나 오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팔로어 58만명이 넘는 그녀가 2000개가 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모두 삭제했고, 화려한 사진 뒤에 감춰졌던 진실을 공개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고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여드름을 감추기 위해 언제나 지나치게 짙은 화장을 해야 했다. 드레스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대가로 400달러를 받았다. 비가 오는 날이라 조깅을 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조깅했던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 예뻐 보이기 위해 수십, 수백번씩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고, 하루 종일 그 사진들을 보정하며 시간을 보냈다.

인스타그램의 스타였던 그녀가 이런 사실을 밝힌 이유는 ‘비참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타인들이 누르는 ‘좋아요’의 숫자로 스스로에 대해 평가받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백영옥 소설가
1년 전, 잠시 포틀랜드에 머물렀다. ‘킨포크 스타일’이라는 잡지가 탄생한 도시이기도 한 그곳에서 ‘킨포크’에 관련 기사를 많이 썼다. 몇년 전부터 포틀랜드가 한국의 ‘제주도’처럼 각박한 도시에 지친 청춘들의 ‘휴식처’로 각광받던 때였고, 하루가 다르게 카페와 독립 출판사, 갤러리 등 공동체 문화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불과 1, 2년 사이 ‘킨포크’라는 말이 주는 피로감 역시 커졌다. 소위 ‘킨포크 스타일’이라는 레테르가 붙은 사진과 글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와 긴밀히 연결돼 있다. 내 인스타그램 친구의 90% 이상은 외국인이고, 다양한 도시에 사는 무용수들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그 도시의 문화의 정서를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도시 간의 ‘차이’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킨포크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이들이 올리는 음식이나 레스토랑, 카페, 집안 인테리어 사진들이 전부 비슷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킨포크 스타일로 대변되는 사진에는 ‘대리석 테이블’과 ‘리넨 테이블보’가 자주 등장한다. 나무나 흰색 벽처럼 무채색 계열의 사물들 역시 자주 등장하는데, 원색은 파프리카나 방울토마토처럼 채소들의 색이 얹혀지는 식이다.

맥북 에어, 식물, 하얀색 침대보와 고양이와 개, 이런 것만 있으면 누구나 킨포크 스타일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태국의 한 예술가는 ‘킨포크적인 사진’의 실상을 조롱하며 쓰레기로 가득 찬 누군가의 방과 침대를 공개하기도 했다. 사진을 찍었던 프레임 속 우아한 침대가 아니라 프레임 밖의 너저분한 풍경이 그 사람의 ‘실제’생활이기 때문이다.

‘킨포크’의 출발은 단순히 말해 ‘함께 모여 밥 먹기’였다. 비싼 유기농 소스가 아니라 집 냉장고에 있는 케첩 하나만 넣은 스파게티라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 먹으면 그 시간이 사랑스러워질 것이라는 게 킨포크의 정신이었다. 빠른 시간을 느린 시간으로, 인스턴트를 자연으로 돌려주자는 취지 말이다. 하지만 이제 ‘킨포크’는 우리에게 ‘라이프스타일 포르노’가 됐다.

가장 지독한 역설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킨포크가 그토록 주장했던 ‘소박함’, 그 자체가 우리에겐 이제 진짜 의미에서의 ‘사치’가 됐다는 점이다. 야근이 잦은 직장인, 학원에 매어 있는 취업생, 식당이며 편의점 곳곳에 퍼져 있는 알바생에게 금방 지은 따뜻한 밥, 엄마의 집밥이란 얼마나 희귀한 것인가. 당장 마감에 쫓겨 햇반(그나마 발아현미라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에 연어 통조림(그나마 참치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삼으며!), 김과 상추를 (그나마 부엌에 서서 싱크대에 설치된 티비 모니터를 보며!) 번갈아 싸먹는 나만 봐도, ‘킨포크’는 그저 먼 나라의 얘기일 뿐인 것이다.

집 앞에 핀 들꽃을 꺾어 화병에 꽂고, 촛불 하나만 켜놓아도 당신의 저녁이 ‘우아해질 것’이란 킨포크의 충고가 틀린 게 아니다. 다만 피어 있는 꽃이 도대체 보이질 않고, 촛불의 그을음 청소하는 게 더 귀찮아질 정도의 피로함이 문제인 것이다.

백영옥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