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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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6조 국책사업, 찻집서 '뽑기'로 나눠먹었다

밑 빠진 관급공사···입찰 담합 실태 들여다보니
서울 강남이나 광화문 일대 찻집에서 국내 굴지의 건설사 영업팀장들이 조용히 모인다. 암호 같은 숫자가 적힌 동전을 통에 넣고 제비뽑기를 하거나 종이를 꺼내 사다리타기를 벌인다. 직장인들의 점심내기 풍경일까. 아니다. 많게는 수조원에서 적게는 수천억원대 관급공사가 이렇게 허탈하게 결정된다. 2010년 이후 관급공사 입찰과정에서 벌어진 건설 대기업의 짬짜미 현장의 재구성이다.

25일 세계일보 취재팀이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담합으로 적발된 122건의 공공건설사업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심의 의결서를 전수분석한 결과 대형 건설업체들은 ‘협상형 나눠먹기’ 짬짜미로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이 과정에서 동전 제비뽑기와 사다리타기로 사전에 낙찰기업과 들러리 업체를 결정하는 수법이 활용됐다. 6년간의 공정위 심의 의결서와 입찰담합 공식 보도자료에 제비뽑기 수법이 적시된 13건의 담합사건 사업비는 6조원대에 달했다. 호남고속철도 차량기지 건설공사를 비롯해 한국가스공사 발주 천연가스 주배관 및 관리소 건설공사, 서해선 복선전철 공사 등에서 제비뽑기의 구태가 벌어졌다. 대형 국책공사 입찰로만 보면 ‘제비뽑기의 나라’에 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입찰에 참여했던 업계 관계자는 “문제를 삼으면 문제였고, 문제를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었다”면서 “이전 정권에서는 공정위에서 문제를 삼지 않으니 우리도 입찰담합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취재팀 분석 결과 지방자치단체 등이 발주하는 폐수종말처리시설과 같은 환경시설 공사 담합은 ‘뒷돈’이 자주 등장하는 뇌물형 입찰담합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참여기업이 영세하고 전문기술이 필요한 분야이다 보니 설계비 보전 등의 명목으로 낙찰자가 탈락자에게 금품을 건네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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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건설업체들이 참여하지 않는 300억원 이하 관급공사에서는 신종수법이 횡행하고 있었다. 지방에서 건설업을 하는 A기업은 2∼5개 정도의 건설업체를 갖고 있다.

낙찰 확률을 높이려고 면허를 여러 개 보유하다가 이미 예정가를 알고 있는 한 공사 입찰에 집중적으로 참여한다. 가끔은 이런 수법을 확대해 소수의 건설업체들이 한 건설업체에 공사의 투찰권을 몰아줘 상호 낙찰확률을 높이기도 한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관계자는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관급공사 입찰에 담합이 만연해 혈세가 줄줄 새고 있다”며 “입찰담합이 적발돼도 공사비 부풀리기를 통한 부당이득이 과징금보다 훨씬 많아 담합이 근절되지 못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법무부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 등을 토대로 기업이 입찰담합을 통해 얻는 이익을 공사 규모의 10~20%로 추산한다.

특별취재팀=이천종·안용성·이현미·이동수기자 sky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