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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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길을 묻다] 누구도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⑦ ‘대학민국’ 슬픈 자화상 / 대학 나와도 취업은 아득… ‘학벌 지상주의’에 멍드는 한국
#. 나는 소위 강남 8학군 명문고로 불리는 학교에 다녔다. 친구들은 당연하다는 듯 1학년 때부터 대학 입시를 준비하며 학교-학원-집을 왕복했다. 이 무리에서 도태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부모님은 나 역시도 이 대열에 합류하게 했다. 어릴 땐 꿈이 많았지만 막상 입시를 준비하다 보니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 한다는 충고는 많았지만 누구도 ‘왜 대학에 가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지 않았고, ‘뭐가 하고 싶은지’를 자세히 묻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나는 재수를 한 끝에 수능 점수와 내신 성적에 따라 (많지 않았던 대학·학과 선택지 중) 서울 소재 A대학의 전자전기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이 선택이 옳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최모(28·대학생)씨의 경험을 재구성한 사례다. 그는 A대학에서 3학년을 마친 뒤 결국 자퇴했고 현재 한 전문대에 입학해 회계를 공부하고 있다.

최씨는 “어느 학교 다니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되고, 주변에서도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 같다”며 “남들보다 늦었지만 지금은 평소 관심이 있었던 분야에서 더 간절히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씨가 A대학에 입학한 것은 8년 전이지만 2016년 우리나라의 입시 현실에서도 이 사례는 그다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간 몇 차례 입시제도의 변화가 일부 있었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집보다 학교와 학원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학원 밀집지역은 지금도 불야성을 이룬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직도 단지 대학만을 목표로 힘겨운 입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대학→취업→성공’이라는 사회적 인식의 테두리를 헤어나오지 못하는 ‘학벌 지상주의’ 대한민국, 또 ‘대학’민국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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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진학률 7년째 OECD 1위

지난해 1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5년 교육지표(Education at a Glance 2015)를 보면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2014년, 25~34세 기준)은 무려 68%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다. OECD 평균인 41%를 훌쩍 뛰어넘을 뿐 아니라 2위인 캐나다(58%)와도 10%포인트나 차이가 날 정도로 압도적이다. 우리나라는 7년째 이 부문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대학진학률이 높은 까닭은 뭘까? 우선 대학졸업이 곧 취업이나 성공과 직결된다는 인식, 또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인식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실제 통계청의 2014년 사회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이유로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서’라는 응답이 46.7%로 가장 많았고, ‘자신의 능력과 소질 개발’(37.5%), ‘학력을 차별하는 분위기 때문’(10.8%) 등의 순이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문화에서 교육은 직업 또는 관직을 얻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해왔을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신분 상승 수단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로 인한 부모들의 높은 교육열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성장의 근간에 교육이 큰 몫을 했다는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통계청의 같은 조사에서 부모가 기대하는 자녀의 교육 수준은 대학 졸업(전문대 포함)이 78.4%, 석사 이상 20.6% 등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원하는 부모가 99%에 달하고 있다. 1973년 조사에서는 자녀의 대졸 및 석사 이상을 기대하는 부모가 50%에 불과했다. 1987년에는 77.5%, 1990년에는 81%까지 오르며 점점 기대치가 높아져왔다.

대학이 지나치게 많아진 탓도 있다. 1995년 제1차 교육개혁 당시 대학설립·정원 및 학사운영이 자율화되면서 당시 131개교였던 일반대학(교육대, 산업대 제외)은 20년이 지난 2015년 기준 189개교로 44% 증가했다.

◆대학 집착 버리려면 고졸 직종 여건 개선해야


OECD 1위인 대학진학률과 달리 대졸자(전문대 졸, 대학원 석·박사 포함)의 고용률은 최하위권이다. 고등교육과정 이수자(2014년, 25∼34세 기준)의 고용률은 76%로 OECD 평균 82%에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보다 고용률이 낮은 OECD 회원국은 이탈리아(62%), 그리스(63%), 스페인(74%), 슬로바키아(75%) 등 4개국이 전부다.

대학에 간다 하더라도 취업과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우리나라의 ‘학벌 지상주의’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취업시장에 대졸 이상 고학력자들이 넘치는 상황에서 고졸 학력으로 가질 수 있는 직업이 점점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는 “학업에 뜻이 없거나 기술·예체능 쪽의 진로를 희망하는 학생들도 전부 대학을 가야 한다고 믿고 있는 상황”이라며 “별도의 학문이나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은행의 경우, 영국 같은 국가는 고졸 출신들이 많이 채용되는데 우리나라는 전부 대학을 나온 인력들이 지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학 정원을 적절히 조정하는 등 기형적인 취업시장 구조의 개선을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기술 발전에 따른 고용시장 구조 변화로 학력에 대한 강박이 더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고졸취업자의 직종에 안정성이 확보되는 것이 중요하다”며 “고졸취업자가 종사하는 대부분 직종의 경우 급속한 기술 발전으로 아예 없어지거나 자동화로 대체될 가능성이 큰데 이들이 이러한 기술변화에 적응하면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꾸준히 교육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내 산업 현장이 다양한 스킬, 직무능력을 평가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부분도 지적했다.

장 교수는 “설사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교육을 시켜서 보낸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시스템이 없다면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것”이라며 “명문대학이 아니더라도, 고등학교만 나왔지만 능력이 뛰어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대학에 목을 매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정우·김주영 기자 woo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