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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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자와 만납시다] 4년 전 7월29일, 가슴을 찡하게 한 선수가 있었다

“지금은 다그치는 위치라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래도 올림픽이 자신에게 소중한 기회라는 것을 아는 만큼 꿈을 이루게 해주려면 제가 독해져야 한다는 것을 선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나중에 올림픽 끝나면 선수들 앙금을 풀도록 해줘야겠죠?”

지난 19일, 브라질 출국을 앞두고 서울 노원구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올림픽 여자 유도대표팀 조준호 코치가 웃으며 말했다. 리우 올림픽 해설위원 자격도 주어진 그는 “세계적인 무대에서는 랭킹 1위도 지는 경우가 있다”며 “선수들에게 후회가 남지 않는 대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 판정번복, 내게 일어나서 다행…'올림픽' 즐기는 선수들에 놀랐다

‘2012 런던올림픽’ 남자 66kg급에서 동메달을 딴 조 코치는 판정번복의 희생양이었다. 8강전에서 만난 일본의 에비누마 마사시와 연장전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심판들이 그의 승리를 인정했지만, 후안 카를로스 바르코스 심판위원장이 심판들과 이야기를 나눈 뒤 승리를 나타내는 깃발 색깔이 바뀌었다.

패자부활전을 거친 조 코치는 7월29일(한국시간), 런던 엑셀 노스아레나에서 열린 동메달 결정전에서 스고이 우리아르테(스페인)를 연장전 끝에 누르고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조 코치를 지켜본 우리 국민들은 분노했다. 정정당당히 싸워야 할 올림픽에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심판의 개입이 선수의 승패를 갈랐기 때문이다.

“차라리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게 다행입니다. 스스로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비록 판정번복으로 졌지만, 패자부활을 통한 동메달까지 꿈의 무대에서 두 번이나 시합을 더 할 수 있었다는 게 좋았습니다.”

 

브라질로 가기 전인 지난 7월19일, 서울 태릉선수촌에서 만난 조준호 코치.


조 코치는 “판정이 한 번 바뀌었기 때문에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을 걸 알아서 빨리 포기했던 것 같다”며 “그 외 문제는 대한체육회가 관여할 일이며, 매트에서 내려오지 않고 망연자실 한다고 (결과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 코치는 런던에 갔을 때 놀랐다고 했다. 선수들이 런던에 온 자체를 즐기는 모습 때문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몇몇 국가만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눈에 불을 켰을 뿐, 다른 나라 선수들은 ‘런던 올림픽’을 즐기는 게 인상 깊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환희는 없었습니다. 귀국 후, 얼마간 삶이 무료할 정도였으니까요. 반드시 자기가 뭘 해내야 한다는 생각보다 그 자체를 즐기는 선수들을 봤습니다. 사실 즐겨야 본인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죠. 그런 게 지금의 제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 험한 말 없이 지도하려 노력…‘귀국행 비행기’ 악몽의 기억

여자 유도대표팀 코치가 된 지 1년이 넘은 그는 어머니와의 전화통화가 생각난다고 했다. 조 코치가 대표팀에 들어가게 되던 날의 일이다.

“여중 교사인 어머니께서 ‘여자는 굉장히 감정적인 동물’이라고 하셨습니다. 절대로 화내거나 욕을 하지 말라고 하셨죠. 화를 낸 적이 있기는 하지만, 욕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신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기쁩니다.”

조 코치가 선수들에게 화를 낸 이유는 ‘예(禮)’ 때문이다. 유도는 예의로 시작해서 예의로 끝난다고 그가 말했는데, 선수들이 인사를 잘 하지 않거나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았을 때 화를 냈다고 설명했다.

 
조준호 코치는 "유도는 예의로 시작해서 예의로 끝난다"고 말했다.


조 코치는 선수들에게 화내는 지도자가 간혹 보이는데, 이는 ‘본인’의 욕심에서 비롯한다고 말한다. 선수를 통해 지도자가 본인의 욕망을 채우려 할 때 폭언과 욕설이 난무한다는 뜻이다. 선수는 존중받아야 하며, 절대로 지도자의 ‘아바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만약 선수가 경기에서 졌다면, 그 순간 가장 비참하고 힘든 사람은 선수 본인입니다. 그런 선수에게 지도자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안아주고 격려해줘야죠. 어떤 기술이 잘못되었다든지의 내용은 그 후의 문제입니다.”

그러면서 조 코치는 과거에 꿨던 꿈 이야기를 들려줬다.

“올림픽이 끝나고, 귀국 비행기에 올랐을 때 승무원에게 제 티켓을 보여주면서 자리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화물칸을 가리키더군요. 그게 제 자리래요. 메달을 못 땄으니 일반 좌석이 아니라 화물칸에 들어가라는 뜻이었습니다.”

압박감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런 꿈까지 꿨을까 하는 생각에 그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 ‘과정’의 중요성, 많은 분들이 아실 것

조 코치는 자신의 동메달을 예로 들며 “3등이 실패자라면 실패자고, 수확을 했다면 또 그 말도 맞다”며 “개인적으로 3등에 오르기까지 정말 죽도록 힘든 시간을 보냈고 견뎠으며, 무사히 경기를 치르고 결과를 얻었다”고 말했다.

조 코치는 “사람들에게 어떤 과정을 알려주는 장치가 있다면, 사람들도 결과가 아닌 과정에 관심을 줄 것”이라며 “인생의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많은 분들이 아시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는 1등만 기억하고, 결과만 기억하는 사회 풍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온 말이었다.

뭔가에 미치도록 몰두하고 후회 없는 결과를 거두는 것. 그런 치열한 시간을 언제 가져보겠냐는 게 조 코치의 생각이다. 그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면서 “자기 일에 미친다면 원하는 결과에 미칠 수 있다”고 했다.

 
조준호 코치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면서 “자기 일에 미친다면 원하는 결과에 미칠 수 있다”고 했다.


태극마크의 의미를 묻자 조 코치는 “상무(국군체육부대)신조에 ‘죽을 수 있어도 질 수 없다’는 말이 있다”고 답했다. “태극마크 달린 도복만 입으면 매트에서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런던 올림픽에서 팔꿈치를 다치고도 코치님께서 보여주신 국민들의 응원 메시지를 보고 힘을 냈었다”고 그는 덧붙였다.

조 코치는 이번 올림픽에서 선수들의 땀을 슬픔의 눈물로 만들어 버리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는 “(런던에서) 맞붙었던 일본 선수에게 국민들의 비난이 쏟아졌지만, 그건 결과를 바꾼 심판이나 로비를 한 사람에게 가야 하는 것이지 선수에게 가서는 안 됐다”고 말했다. 자신도 슬펐지만, 일본 선수도 괴로웠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 십자인대 파열에도 굴하지 않은 선수가 있습니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이르자 조 코치는 두 선수를 언급하며 이들이 매트에 서는 것도 기적이라고 했다. 바로 여자 유도 63kg급의 박지윤과 남자 유도 100kg급의 조구함 선수다.

“두 선수 모두 올림픽 100일 전에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걷지도 못했어요. 조구함 선수는 연습하다 다쳤고, 박지윤 선수는 올림픽 티켓이 달린 대회에서 싸우다 다쳤습니다.”

조 코치에 따르면 유도는 개인에게 티켓이 배정되는 터라 대체선수가 없다. 이들이 포기하면 대신 올림픽에 나갈 선수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걷지도 못하던 선수들이 수술을 하면 회복할 시간이 없으니까 재활로 견디고 있습니다. 올림픽이 소중한 기회이자 꿈의 무대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현재 수술 날짜도 나와 있습니다. 대회 끝나고 귀국하면 바로 수술대에 올라야 합니다.”

조 코치는 “주치의조차 선수 생명이 끝날 수 있다고 했는데, 국가대표로서 매트에 오르고자 열심히 준비 중”이라며 “매트에 서는 것도 ‘기적’인 두 선수가 국민들에게 ‘기적’을 보여드릴 수 있다고 믿는다”고 힘주어 말했다.

조 코치는 끝으로 “우리 선수들이 죽도록 열심히 준비해왔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며 “죽겠다는 각오로 싸울 준비가 된 만큼 국민들이 응원 보내주시고 관심 가져주시면 좋은 결과로 보답하겠다”고 말을 맺었다.

[조준호 코치의 인사 영상]




김동환 기자 kimcharr@segye.com
사진·영상편집=김경호 기자 stillcu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