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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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취재] 반세기 넘은 '다단계 착취'… 도로 위 '시한폭탄' 만든다

[도로 위의 ‘시한폭탄’ 화물차] 〈하〉 ‘지입제’ 폐단 근절 대책은? / '을' 화물차주 생존권 보장 필요… "표준운임제 도입해야"
올해에도 화물차의 졸음운전으로 대형사고가 연이어 발생하고 국민 우려가 커지자 정부도 대책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정부 대책이란 게 화물차 안전장치 장착 및 운전자의 휴식시간 의무화 등에 그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최소한의 생계를 꾸려가려면 졸음운전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들을 손보지 않은 채 사고 자체를 줄이는 데만 초점을 맞춘 미봉책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입제 등 화물차업계의 고질적인 폐단을 바로잡고 적정 운임 보장 등 근본적인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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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입제, 반세기 넘은 운수업계 ‘고질병’

29일 화물차업계 등에 따르면 화물운송 노동자들이 뭉친 화물연대가 2002년 출범한 이후 2003·2008·2012년 세 차례의 대규모 파업이 일어날 때마다 가장 많이 언급된 문제가 ‘지입제’다. 전문가들도 화물운송 시장을 개선하고 화물차 운전자의 졸음운전을 막기 위해 지입제의 폐단부터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에 이견이 없다.

지입(持入)은 ‘가지고 들어온다’는 뜻처럼 화물차주가 차량의 명의를 운송사에 위탁하는 것으로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등장했다. 화물차주는 운송업체를 차리지 않아도 일감을 받을 수 있고 운송사업자는 화물차를 다량으로 확보하지 않아도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는 게 지입제의 장점이다.

그러나 지입제는 차주와 운송사업자 간 법률적 근거가 없는 계약관계라는 점이 문제다. 당사자들이 선의에 따라 지입제를 활용하기보다 이익에 눈이 멀어 악용할 경우 폐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예컨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운송업체가 차주에게 불합리한 계약을 강제하고 해당 차주가 어쩔 수 없이 계약을 이행한 이후 피해를 입어도 구제받을 길이 막막하다.

또 차량이 없어도 회사의 설립·운영이 가능하다 보니 운송업무는 하지 않고 지입료(차량 위수탁 계약에 따른 관리비)나 일감 중개 수수료만 챙기는 업체가 난립한다.

지난 23일 화물차 운전자의 졸음운전으로 고속도로에서 건축자재용 철판이 쏟아져 차량 29대가 파손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자료사진
2007년에는 회사 수익 전체를 지입료에 의존하는 업체가 57.7%를 차지하기도 했다. 운송계약 곳곳에 이런 중개·알선업체가 끼어들며 화주가 화물차주에게 지급한 운임 중 30∼40%를 챙기고 있다.

이 때문에 정부도 지입제를 폐지·개선하려고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상황이 나빠지고 있다.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 이후 화물차주가 급증하는 등의 요인까지 겹치며 2008년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에서는 화물차주의 97%가 지입차주로 나타났다. 화물연대 관계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지난 19대 국회에서는 화물차주가 1대씩 운송사업 허가를 신청할 수 있도록 번호판을 부여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화물자동차운수사업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무산됐다.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계열 사회공공연구원 이영수 연구위원은 “화물차주가 운송 행위를 하기 위해 운송업체로부터 영업용 번호판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이 운송업체에게는 재산권이고 기득권”이라며 “사실상 운송시장에서 화물차주 외에는 지입제를 없애고자 하는 사람이 없어 폐지가 쉽지 않은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화물차주가 위험 감수할 필요 없는 생태계 시급


당장 뿌리를 뽑는 게 어려운 지입제 대신 운송 품목별·구간별 표준운임제를 도입하자는 의견도 많다. 야간 운행과 과속 등 장시간 노동을 하는 이유가 다단계 착취구조 속에 비롯된 낮은 운임을 만회하려는 것인 만큼 최저임금제 형식의 운임 기준을 만들자는 것이다.

지입제 체계상 우월한 지위에 있는 화주나 운송업체가 화물운임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거나 운송에 드는 비용 부담을 과도하게 화물차주에게 지우는 행태가 만연하기 때문이다. 정부도 이런 점을 감안해 표준운임제에 대한 법제화 방침을 밝혔지만 결국 권고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화물연대 관계자는 “표준운임제가 도입되면 이를 맞출 수 없는 중간업체들이 정리되면서 다단계 착취구조도 해소될 수 있다”며 “그러나 직접적인 강제조치가 동반되지 않은 운임체계 개편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학습지교사나 택배기사처럼 특수고용노동자(개인사업자)로 분류되는 화물차주의 노동자 지위 인정 여부도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다. 화물차주는 노동자처럼 일하는데도 법적으로는 자영업자여서 근로기준법의 보호나 산재보험을 적용받지 못한다. 한 화물차주는 “우리는 운송업체나 알선업체 등을 통해 배차지시를 받고 업무를 하기 때문에 ‘업무적 종속성’이 성립한다”고 말했다.

인하대 권오경 교수(물류학)는 “화물차주를 착취하는 구조로는 물류업계의 지속성을 담보하거나 급변하는 업계 추세에 적응하기 힘들다”며 “정책 목표를 정할 때 경제적 효율성에 치우치지 말고 사회적 효율성도 감안해 화물차주의 생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