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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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케이스 걸릴라' 조심… 몸 사리는 대상자들

권익위 전화문의 3배 급증… 친분 있어도 식사 '더치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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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홍보실 직원 김모(36)씨는 지난 27일 동료 직원, 담당기자 몇 명과 갖던 저녁 술자리를 오후 11시50분쯤 파했다. 10분 뒤 28일 0시부터 시행되는 ‘김영란법’에 혹시 저촉될 일이 생길까 걱정돼서다. 꽉 차 있어야 할 다음달 점심·저녁식사 약속도 달랑 2건뿐이다. 그나마도 평소 친분이 두터운 언론인과 ‘더치페이’를 전제로 한 약속이다.

김씨는 “김영란법 시행에 앞서 대한상의에 이것저것 자문을 했는데 애매한 것은 다 ‘일단 하지 말라’고 조언하더라”며 “법원 판례가 나오기 전에는 최대한 운신의 폭을 좁히고 조심해서 ‘시범케이스’가 되지 말자는 게 홍보업계 분위기”라고 말했다.

아직은… 한산한 공익침해 신고센터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시행 첫날인 28일 한 시민이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국민권익위원회에 설치된 ‘정부 합동 부정부패, 공익침해 신고센터’에서 상담을 받고 있다.
남정탁 기자
한국 사회의 부정부패를 근절하고 술과 식사, 골프 등 각종 접대문화의 지각변동을 일으킬 김영란법이 28일 시행됐다.

주무 부처인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이날 오후 6시쯤 서대문구 권익위 서울종합민원사무소를 통해 관련 신고가 처음 접수됐다. 수사기관인 경찰에는 이날 오후 9시까지 2건의 서면신고가 들어왔다. 1건은 ‘신연희 강남구청장이 경로당 회장 160명을 초청해 문화예술 체험 프로그램 일환으로 관광을 시켜주고 점심을 제공했다’는 내용이었다. 또 1건은 강원도의 한 경찰관이 ‘민원인이 떡 1상자를 보내 와 돌려줬다’고 감찰 계통을 통해 신고한 것이었다. 112를 통해서는 3건의 신고가 접수됐으나 모두 요건을 갖추지 못해 경찰관이 현장에 출동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경찰청 관계자는 법 위반행위 신고가 많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간 김영란법 홍보가 많이 된 데다 시행 첫날이어서 공무원 등 적용 대상자들이 모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서울 마포구의 한 식당에 ‘영란세트’를 알리는 안내문구가 붙어 있지만 손님이 없어 썰렁하다.
남제현 기자


예약 끊긴 한정식당 공무원 등이 직무 관련자로부터 3만원 이상의 식사 접대를 받지 못하도록 한 ‘김영란법’ 시행 첫날인 28일 서울 서초구의 한 한정식당 관계자가 김영란법 시행 전 빼곡했던 예약장부와 이날부터 빈칸이 많은 예약장부를 비교해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각계의 ‘소나기는 일단 피하고 보자’는 분위기는 권익위나 각 부처 청렴담당관실로 문의가 폭주하는 데에서도 감지된다.

권익위에는 평소 1000건 수준이던 전화문의가 전날부터 2∼3배 급증해 담당 직원들이 비상에 걸렸다.

권익위 관계자는 “시행일자, 대상 등 법령에 명확하게 제시된 내용에 대한 문의는 즉각 답변을 해 드린다”면서도 “유권해석은 자의적 판단으로만 할 수 없기 때문에 홈페이지나 공문서를 통해 공식 문의를 하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의 한 공공기관 청렴담당관도 “잠깐 자리를 비우면 연락 바란다는 메모가 수북이 쌓일 정도로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며 “협력단체와 회의 후 이어지는 식사처럼 원활한 직무수행 차원에서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사항에 대해서도 비슷한 질문이 계속 들어온다. 다들 조심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무원끼리 “같은 부서 상급자한테 커피 한 잔 사는 것도 안 되느냐”며 갑론을박하는 모습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이날 형사정책연구원 강석구 박사가 페이스북에 ‘앞으로 란파라치(김영란법+파파라치)의 그물이 예상된다’며 남긴 글이 카카오톡 등으로 확산되기도 했다. ‘스승이나 직장 상사·동료에게는 물 한 잔도 사지 마라’, ‘계속적인 (식사·금품) 거래가 오갈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사귀어라(연애를 해라)’라는 내용이 화제를 모은 것이다. 강 박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적은 글이지만, 란파라치가 신고에 앞서 위반자와 합의를 시도하거나,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공직자를 제거하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일이 진짜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