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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고개 아리랑'-국가의 토지강탈 의혹 사건] "공권력 개입해 땅 가로챘다면 문제 큰 것"

땅 소송 당시 대법원 등기과장 주명식 법무사 인터뷰/“이갑수 땅 처분 공부상 안 나타나… 실질 소유주 맞다”
주명식 법무사가 지난달 19일 경기 광명시에 있는 사무실에서 등기부상 토지 소유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갑수씨 후손 땅 소송이 대법원에서 진행되던 1981년 대법원 등기과장이었던 주명식(82) 법무사는 “등기부상 이갑수씨의 땅이 맞다”고 판단했다. 그는 당시 유태흥 대법원장의 요청을 받고 문제의 땅을 검토해 이와 같은 의견을 내고, 이후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도 같은 취지의 검토서를 제출했다. 지난달 19일 경기 광명시에 있는 사무실에서 취재진과 만난 주 법무사는 당시의 기억을 비교적 상세하게 떠올렸다. 다음은 주 법무사와의 일문일답.

―이 땅의 주인을 놓고 소송이 진행될 때 자문역을 하셨는데.

“등기부상 하자가 있느냐, 지적공부(公簿)상 하자가 있느냐, 검색해봤다. 등기부상으로만 볼 때 이씨가 분필등기(1필로 등기된 토지를 2필 이상으로 분할해 등기)하면서 빠져버렸다. 등기 절차상으로 보면 있어야 하는 분인데 없더라. 실질적 소유가 이씨, 영정갑수(창씨개명 이름)씨 소유가 맞다고 판단했다.”

―어떻게 이름이 사라진 건가

“땅을 분할하면서 다시 등기부를 만들 때 이름이 빠졌다. 등기부상으로 맨 처음에 이씨가 1940년 9월12일에 보존등기(미등기 부동산을 처음 등기)했다. 그다음에 각 순위 1호로 이씨가 했고, 그 후로 종친회(종중)로 넘어갔다가 다시 1945년에 영정갑수씨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원점에서는 처음 보존등기 때부터 이씨 거다. 이걸로 봐서는 이씨 것으로 보는데 왜 이씨가 없어졌느냐. 이것이 등기소의 착오인지, 어떤 불법이 개입됐는지 그건 모르겠다.”

(이씨의 사위 송세관씨는 이와 관련해 당시 관할 등기소인 안양등기소에서 “8·15 광복 직후 혼란기여서 등기 공무원이 실수를 한 것 같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밝혔다.)

―1960년대까지 이씨 소유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는 건가.

“공부상으로 봐선 이씨가 처분했거나 그런게 나타나있지 않고 그냥 없어졌으니까. 이씨가 땅을 처분한 것이 아니라면 그대로 있어야 하는데 처분한 사실은 나타나지 않는다. 처분한 것이 안 나오니까 원점으로 돌아 이씨 거라고 보는 거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지금은 1960년에 ‘등기형식주의’가 돼서, 다시 말해 매매나 상속한 일자와 등기일자가 다르면 등기일자에 의해 처분권이 (성립)되는 것이고, 60년 이전에는 ‘의사주의’여서 등기는 사고 정리하는 문서고 실질적으로 거래가 어떻게 됐나가 핵심이었다. 등기 중시 안 할 때니까 (등기부에서 이름이) 없어져도 괘념을 안 할 때다.”

―박모씨는 이 땅을 이씨가 아닌 종중에서 샀다고 한다.

“그땐 종중이 사실 실체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관습법상 족보를 근거로 종중이 돼있었지 법적 보호를 못 받았다. 누가 나서서 종친회라고 하고 다 팔고 그랬다. 처분 권한은 이씨가 갖고 있었는데 종친회에서 샀다고 하는 건 무효다. 팔아도 이씨가 팔아야 한다. 그래서 그때 (땅 찾기) 소송을 하면 나는 된다고 봤다.”

―하지만 재판에서 땅을 찾지 못했다.

“소송으로 밝혀져야 하는데 국가가 소송을 방해했다면 말이 되지 않는 거다.”

―등기에서 이름이 빠지는 일이 많이 있었나.

“많이 있었다. 1960년 신법이 도입되고 등기형식주의가 되다보니까 (등기에서 이름이) 빠진 것도 있고 안 빠진 것도 있어 전부 정리를 했다. 신법으로 넘어오면서 정리를 다 했어야 하는데 정리가 잘못된 게 많았다. (이씨 땅도) 정리 안 한 부동산이라고 본다.”

―1960년대 당시 납북돼 주인이 없거나 친일파의 땅 등을 국가가 뺏는 경우가 많았다던데.

“등기 자체가 안 된 게 많았다. 그런 건 소송으로 밝힐 수밖에 없다. 소송이 많이 나와서 등기를 악용하기도 했다. 그 후도 이런 게 자꾸 정리가 안 돼서 특별조치법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특별조치법은 현재 가지고 있는 사람 위주로 돼있었다. 시장, 군수가 공고해서 ‘이 땅 임자 나와라’ 하고 안 나타나면 현재 소유자한테 줬다. 아주 안 나타나면 국유로 간주해버리고. (이씨 땅 사례처럼) 그런 부정관계도 많았다.”

―이 부동산을 뺏어서 자본화해 정치자금으로 만들고 육영재단, 구국봉사단 등의 설립·운영자금으로 사용됐다는 증언도 있다.

“그런 소송이 옛날에도 많이 있었다. 눈 멀쩡히 뜨고 있는 개인 것을 국가 것으로 만든 사건이 많이 있었다. 1960년대 의사주의에서 형식주의로 바뀐 다음에 많았다. 공권력이 개입돼 한 것이라면 문제가 큰 거다.”

―시효가 지나서 못 찾는다는데 어떤 법에 근거한 것인가.

“민법에 따라 소송권리 등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져있다. 행사 안 하면 포기한 것으로 간주해서 정리하는 것이 시효 제도다. 남에게 돈을 꿔줬어도 10년 뒤에도 청구하지 않으면 안 받겠다는 의사니까 소멸시효가 된다. 반대로 부동산 같은 것은 남의 토지라도 내 이름으로 10년간 가지고 있으면 인정을 한다. 개인 간 매매에서는 안 때로부터 10년이지만 국가와 국민 간에는 시효가 없다.”

#등기 이전 과정 여전히 '미스터리'

경기 시흥군 봉천리 산174번지 토지의 최초 소유자인 이갑수씨 이름이 토지등기부에서 돌연 사라졌다가 제3자로 소유권이 넘어가는 과정은 지금까지 의문으로 남아있다.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12일 취재진이 확인한 등기부에 따르면 해당 토지는 1940년부터 이씨 소유였다.

이듬해 해당 토지는 전주이씨 영응대군파 종중(이하 종중)으로 잠시 이전됐다가 다시 1945년 2월 5일 매매를 통해 이씨 소유가 됐다. 이어 8월 27∼28일 174번지가 174-1부터 174-9까지로 분할등기되면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이씨 이름이 사라진 174-6부터 174-9까지의 토지는 각각 다른 사람 이름으로 넘어간다.

소송이 진행된 174-9의 경우 1968년 11월 10일 매매돼 1969년 9월 11일 소유권이 종중에서 박모씨와 김모씨로 이전된 것으로 나타난다.

흥미로운 점은 등기부에 기록된 박씨 이름이 이씨 이름과 달리 초서로 부실 기재됐다. 등기부에는 초서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원 소유자의 반응이나 대응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씨는 1970년 8월 18일 법원의 개명허가를 받아 원래의 이름 대신 등기부에 기록된 이름으로 변경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한 법무사는 “토지 사기에서 처음에는 가명이나 허무인(虛無人·가설인)을 이용해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 원래 권리자의 반응을 살핀 뒤 특별한 움직임이 없으면 호적의 이름을 등기 이름으로 바꿔 재산권을 행사하는 전형적인 수법”이라고 설명했다.

박씨는 소송 과정에서 종중으로부터 해당 토지를 매입했다고 밝혔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영응대군파 17대손인 이상권씨(이갑수씨 아들)의 확인이나 인지 없이 토지가 매매된 경위가 석연치 않다.

특별기획취재팀=김용출·백소용·이우중·임국정 기자
영상편집=김경호 기자

※관련 동영상은 세계일보 홈페이지(www.segye.com)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