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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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몸과 함께 굳어버린 '마음'… 병원선 우울증 약만

척수장애 발생, 20대 24.4%로 최다 / 송두리째 바뀐 삶에 충격·혼란 겪어 / 10명 중 7명 자살충동… 일반인 10배 / 재활프로그램 대부분 신체에 치중 / 장애 받아들이는건 개인의 몫 치부
평범한 삶이었다. 이재훈(가명·33)씨의 인생은 ‘그날’ 이전에는 남들과 다르지 않았다. 수도권의 한 대학을 나왔고,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입사 2년쯤 지나자 인생의 궤도가 어느 정도 그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상사나 부모님을 보면 막연하게나마 앞으로의 삶을 가늠할 수 있었다. 크게 성공한 삶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다 싶었다.

사고는 순식간이었다. 야근 후 택시를 탔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의사가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어머니는 재훈씨를 붙잡고 울었지만 그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그가 상상했던 미래에는 없던 일이었다.

말수가 줄었다. 병원에서는 우울증 초기라고 했다. 병원에서 한 번, 집에서 한 번 목숨을 끊으려 했다. 어머니는 그가 또 나쁜 마음을 먹을까봐 매일 밤 손을 붙들고 같이 잤다. 퇴원 후 2년 가까이 병원 갈 때를 빼고는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변화가 생긴 건 지난해 우연히 척수장애인 인터넷 커뮤니티를 알게 되고 나서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조심스레 자신의 이야기를 남겼다. “나도 그 마음 안다”는 댓글을 보고 울음이 터져나왔다. 재훈씨는 “아무도 날 이해 못한다는 생각에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내 장애를 제대로 마주보게 됐다”고 회상했다.

조금씩 용기가 생겼다. 사고 후 처음으로 산책하러 나갔다. 몇 년 만에 외식도 했다. 아직 두려운 점도 많지만, 재훈씨는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 조금씩 자신의 장애를 알아가고 있다. 그는 “용기를 내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병원에서 마음은 치료해주지 않았다”며 “다른 사람들은 이런 시행착오를 짧게 겪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몇 년간 집에만 있었던 재훈씨의 삶은 척수장애인 사이에서는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다. 어떤 이는 외출을 하기까지 10년 넘게 걸렸고, 상황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회와 단절된 채 고립된 삶을 살고 있다.

16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4년 기준 등록장애인은 272만7000명으로 전체 인구의 5.6%다. 이 중 88.9%는 사고나 질병으로 장애를 갖게 된 중도(中道)장애인이다. 특히 하반신 또는 상·하반신이 마비되는 척수장애인은 대부분이 중도장애인이다.

하루 아침에 장애를 갖게 된 중도 척수장애인은 신체적 고통은 물론 장애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심리적 충격을 경험한다. 또 장애가 학업·경력 단절로 이어져 사회적 고립과 경제난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시 사회에 나오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국내 재활시스템은 ‘신체 치료’에만 초점이 맞춰져 마음의 상처에는 방관하고 있다.

“바로 전날, 아니 그날 점심때까지도 ‘올해 휴가는 어디로 갈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걸을 수 없게 된 거예요. 하던 일은 그만둬야 하고, 주말이면 자전거로 몇 시간씩 달리던 사람이 당장 집앞 슈퍼 가는 것도 힘들어지고… 삶이 송두리째 바뀐 거죠.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빨리 받아들이라’고 하면, 흔쾌히 수긍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척수장애인 이진영씨)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척수장애인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이다. 척수장애는 중도장애(후천적 장애)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은 장애다.

16일 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 따르면 2015년 전국 척수장애인 600명을 조사한 ‘척수장애인 욕구 및 실태조사’ 결과 장애 원인이 선천적 기형인 사람은 0.3%에 불과했다. 국립재활원이 1994∼2014년 입원 척수장애인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장애 발생 연령은 20대가 24.4%로 가장 많았고 30대(20.7%)가 뒤를 이었다. 한창 사회활동이 활발한 시기, 하루아침에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은 큰 충격과 혼란을 겪고 적응하는 것을 힘겨워한다. 신체뿐만이 아닌 마음에도 장애가 생긴다.

◆높은 우울감… 10명 중 7명 자살 충동

“다리가 안 움직였지만 일시적인 것이라 생각했어요. 영영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몸의 반이 죽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최성혁(36)씨는 2011년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아프지 않게 자살하는 법’을 검색하곤 했다”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가족들에게도 계속 화만 냈다”고 털어놨다.

9년 전 교통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된 서모(43·여)씨도 “사고 후 삶에 의욕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장애인이 됐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주변과의 연락도 다 끊었다. 그는 “6개월이 지나 장애인 복지카드가 나왔는데 카드를 보면서도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며 “장애를 인정하고 밖에 나가기까지 2년 정도가 걸렸다”고 말했다.

이처럼 많은 척수장애인들이 장애를 갖게 된 뒤 우울감이 높아지고 현실을 외면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에 따르면 장애를 인정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2∼3년이 31.2%, 3년 이상이 26%였다.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도 14.3%나 됐다.

김종인 나사렛대 교수(재활복지대학원장)는 중도장애인이 ‘충격-부정-우울-독립(퇴원)에 대한 저항-적응’의 5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한다. 초기에 ‘심리재활’이 잘되면 빨리 적응단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많은 이들이 ‘충격·부정·우울’ 상태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다. 김 교수는 “장애 초기에 장애교육과 심리상담 등 꾸준한 심리재활이 있어야 장애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장애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해 자살을 생각하기도 한다. ‘2015 척수장애인 욕구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8.8%가 척수 손상 뒤 자살충동을 느꼈다고 답했다. 이는 국내 성인 평균 자살충동 경험률(6.4%·통계청 ‘2016년 사회조사결과’)보다 10배 이상 높은 것이다. 자살을 시도했다는 비율도 32%에 달했다. 자살충동을 느낀 가장 큰 원인(복수 응답)은 ‘삶의 의욕상실’(50.4%)로, ‘신체적 장애’(40.4%)보다도 10%포인트 높았다.

◆장애는 ‘혼자 이겨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국내 재활시스템에서 심리재활은 등한시되고 있다. 병원의 재활프로그램은 신체재활 위주로, 중도장애인을 위한 심리재활 프로그램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나마 다른 곳보다 프로그램이 체계적이라고 평가받는 국립재활원도 마찬가지다. 환자를 대상으로 심리검사를 하지만 담당직원이 부족해 지속적인 심리상담은 불가능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척수장애인들이 장애를 수용하면서 느끼는 혼란스러움을 홀로 견뎌야 한다. 장애를 인정하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의 개인적인 역량으로 치부되며,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은 정신력이 약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최성혁씨가 회상하는 병원생활은 온전히 그 자신으로 살지 못했던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병원에서는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신과 약을 처방했다. 최씨는 “그 약을 먹으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계속 웃기만 했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약을 안 먹으면 안 되느냐고 묻자 주치의는 “환자가 젊은데 ‘나쁜 마음’을 먹으면 어쩌냐”며 반대했다. 최씨는 “6개월간 상담 한 번 없이 약만 먹었다”며 “‘나쁜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는 병원의 대처는 마음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것이 아닌 우울증약을 주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척수장애인 손모(40)씨도 “병원에서는 몸 상태만 신경을 썼다. 가장 아픈 곳은 마음이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찬우 척수장애인협회 사무총장은 “심리재활은 재활의 첫단추인데 병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국내 재활시스템은 첫단추부터 잘못 끼우다 보니 나머지가 다 엉망진창이 되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김모(40·여)씨의 동생 혁권(가명)씨는 몇년 전 우울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옥상에서 추락해 겨드랑이 아래쪽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동생은 사고 후 눈에 띄게 말이 없어졌지만 가족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김씨는 “수술 후 몸의 상처는 아물고 있었지만 마음의 상처는 곪아가고 있던 것”이라고 말했다. 동생의 죽음이 알려지자 주변 사람들은 “마음이 여려서 장애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씨에게 동생의 죽음은 개인적 죽음이 아닌 사회적 죽음이다.

김씨는 마음의 병을 악성 종양에 비유했다. 그는 “몸 안에 악성 종양이 생기면 겉으로 티가 안 나고 본인도 잘 모르지만 의사들이 진단하고 치료해 주지 않느냐”며 “마음의 병도 겉으로 잘 안 보이고 자신도 심각성을 모르니 병원에서 진단해야 한다. 장애를 왜 받아들이지 못했느냐고 하는 것은 ‘왜 암을 혼자 못 이겨냈느냐’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생도, 저도 장애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무지했어요. 그때 누군가 알려줬다면 어땠을까요. 혼자 이겨내라고 하지 말고 치료를 해줬다면….” 현재의 재활시스템에서는 제2, 제3의 혁권씨가 계속 생길지도 모른다.

김유나·이창훈 기자 yoo@segye.com

척수장애인이란

척수장애는 사고나 질병 등으로 척수(척추 내에 위치하는 중추신경의 일부분)가 손상돼 신체와 두뇌 사이의 신경전달통로가 끊어진 장애를 뜻한다. 통상 손상부위 아래의 감각과 운동 기능에 장애가 발생하고 대소변장애, 성기능장애 등 다수의 중복 장애와 합병증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 보건복지부의 장애인 분류에는 ‘지체장애인’ 속에 포함돼 정확한 실태조사는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한국척수장애인협회는 국내 척수장애인을 전체 인구의 0.1%가량인 8만여명으로 추정한다. 매년 2000명이 척수장애인이 된다. 협회의 ‘2015년 척수장애인 욕구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장애 원인의 89.4%는 외상이었다. 외상은 교통사고가 53.6%로 가장 많았고 추락이나 낙상 22.3%, 산업재해 14%, 다이빙 3.3%, 스포츠·레포츠 2.4% 등의 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