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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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현장] ‘고교학점제’ 초기 모델 서울 한서고 가보니…

2018년 학교 현장 단계적 도입 앞두고 개방형 교육과정 운영 학교들 주목 / “참여도·수업의 질 향상” 긍정적 평가 / 지역·도농간 교육 격차 부작용 우려 / 교육계 “자칫 교육현장 혼란만 가중 / 교사 수급 등 인프라 구축 선결 과제”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한서고등학교의 한 2학년 교실. 오후 1시20분 5교시 시작 종이 울리자 학생들이 교과서와 필기구 등을 손에 든 채 이 교실 안으로 몰려왔다. 2학년 2반과 3반, 7반 등 여러 학급에서 온 학생들은 이날 교실을 옮겨 한국지리 수업을 들었다. 같은 시간 다른 교실에서는 세계사, 법과정치 등 다른 사회과목 수업이 동시에 진행됐다. 한서고에서는 문과 학생이 물리 수업을 듣거나 이과 학생이 경제 수업을 듣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올 1학기부터 학생들이 듣고 싶은 과목을 일부 선택할 수 있는 ‘개방형 선택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방형 교육과정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표 교육공약인 ‘고교학점제’의 초기 단계 모델이다.

◆조는 학생 사라지고… 진로 맞춰 수업 선택

대학처럼 고교에서도 학생들이 원하는 강좌를 신청해 수업을 듣고 학점을 취득해 졸업하는 고교학점제의 도입을 앞두고 개방형 교육과정을 운영 중인 학교들이 주목받고 있다. 개방형 교육과정으로 고교학점제의 성과와 과제를 미리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부 관계는 19일 “고교학점제가 내년부터 학교 현장에 단계적으로 도입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서고의 사회과목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자거나 꾸벅꾸벅 조는 학생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여느 일반고의 수업과 다른 광경이다. 2학년 2반 함미정(17)양에게 그 이유를 묻자 “각자가 관심 있는 과목을 골라 수업을 듣기 때문”이라며 “스스로 준비한 내용을 발표할 때도 다들 적극적이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는 고교학점제의 도입 취지이기도 하다.

학생 개개인의 진로희망과 수준에 맞춘 학습이 가능해진다는 점도 개방형 교육과정, 나아가 고교학점제의 장점 중 하나다. 교사를 꿈꾸는 2학년 3반 변미연(17)양은 교양과정으로 개설된 교육학 수업을 듣고 있다. 변양은 “평소 생각하던 진로와 관련된 과목을 들을 수 있어 좋다”며 “수업도 발표 중심이라 일반적인 수업보다 재밌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 학교에서 경제를 가르치는 장만진 교사는 “학생들이 본인의 진로나 적성에 맞춰 수업을 선택하기 때문에 참여도도 높고 수업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설명했다. 장 교사는 매년 2학기에 서울 소재 학교 학생이면 누구나 와서 들을 수 있는 국제경제 수업도 진행하고 있다.

서울 강서구 한서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지난 8일 한국지리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 점심 시간 직후인 5교시 수업이지만 졸거나 자는 학생이 한 명도 없다. ‘개방형 선택 교육과정’을 운영 중인 이 학교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희망과 적성에 맞춰 사회 등 일부 교과목의 수업을 선택해 들을 수 있다.
이재문 기자
◆교사 확충·평가 부담 해소 등 과제도 많아


개방형 교육과정은 분명 장점이 많지만 고교학점제 도입까진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사들의 업무량 증가와 이에 따른 교사 확충 문제다. 학생 수요에 맞춰 다양한 수업을 개설하는 만큼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김종희 한서고 교감은 “우리 학교는 그나마 한 학년이 250명 정도로 규모가 작은 편에 속하지만 학생 수가 많은 학교는 (고교학점제 도입이) 굉장히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문제는 앞서 새 정부 인수위원회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지난 2일 서울 도봉고를 방문해 현장의 의견을 들었을 때도 지적된 바 있다. 선택 과목이 다양해지면서 공강(수업과 수업 사이의 빈 시간)이 발생하거나 교과 교실이 부족해지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지역·도농 간 교육 여건 격차도 우려되는 부분이다. 교원 수급과 인근 학교와의 공동과목 개설 등이 비교적 수월한 도시에 비해 농산어촌이나 도서지역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시험과 평가에 부담감을 가진다는 점 역시 해결돼야 한다. 2학년 3반 현성현(17)양은 “개방형 교육과정 운영 이후 시험 범위와 과목 수가 모두 많아졌다”며 “시험기간도 전보다 길어져 힘들다”고 털어놨다.

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진로나 적성에 관계없이 과목을 선택하거나, 이로 인해 일부 과목의 수강신청 경쟁이 치열해질 가능성도 있다. 대학수학능력시험 전 영역 절대평가화와 맞물려 고교 내신 성취평가제(절대평가)가 논의되는 것도 고교학점제 도입과 관련해 이런 문제들이 계속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생과 교사들은 수능 절대평가와 내신 절대평가로 변별력이 떨어지면 대학입시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도입에는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내비쳤다.

◆“도입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교육계 관계자들은 고교학점제를 도입하기 전에 충분히 시간을 갖고 준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재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고교학점제는 선결과제가 많은 정책”이라며 “치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학교 현장에 혼란만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종희 교감도 “먼저 개방형 교육과정이 정착되고 논의가 차근차근 이뤄져야 한다”며 “아직까지는 일선 고교가 고교학점제를 시행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육 전문가는 “고교학점제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일시에 도입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2010년쯤에 고교학점제가 논의된 적 있는데 그때도 내신이나 교사 수급 등의 문제로 보류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학생 입장에선 교과목 선택권이 보장돼야 하지만 교육이라는 게 학생만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이라며 “국민 다수의 공감을 얻어 제반 여건 마련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후조 고려대 교수(교육학)는 “고교학점제에 국가 예산 등 사회적 비용을 어느 정도로 투입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학생 개개인의 진로별·수준별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게 중요하지 단순히 선택권만 많이 준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다”며 “학년이나 연령에 따라 반드시 특정 수업을 이수해야 한다는 인식을 깨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주영·송민섭 기자 buen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