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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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현장] '수월성' vs '형평성' … 혼란에 빠진 교육현장

외고·자사고 존폐 논란 / “교육 형평성 침해·입시 사교육 과열” / “교육 질 향상… 학교 선택권 충족” 팽팽 / 내신 절대평가 땐 교육 격차 심화 우려 / 찬성 53% 반대 27%… 폐지 여론 우세 / 관련법 시행령 개정 신중론 잇따라 / “대학 서열화 개선 병행 추진” 주장도
“학부모와 학생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방적인 자율형사립고등학교 폐지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던 26일 오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서울지역 자사고 학부모들의 모임인 ‘자사고 학부모연합회’ 회원 2000여명(주최 측 추산)이 검은 옷을 입은 채 한데 모였다. 이들은 굳은 표정으로 ‘자사고 폐지 결사반대’ 등이 적힌 피켓을 들고 같은 내용을 구호로 외치며 집회를 이어갔다.

정부와 일부 시·도교육청의 외국어고·자사고 폐지 움직임이 본격화하면서 교육현장이 일대 혼란에 빠졌다. 국민 절반이 외국어고·자사고 폐지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으나 해당 학교 교원과 학생, 학부모들이 연일 거세게 반발하는 등 반대여론도 만만찮다. 이 때문에 외국어고·자사고 폐지를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게 교육계의 중론이다.

◆국민 52.5%가 “찬성”… 반대 여론도 고조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리얼미터는 전국 19세 이상 성인 506명을 대상으로 외국어고·자사고 존폐에 관한 여론조사를 한 결과 ‘폐지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52.5%,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가 27.2%, ‘잘 모르겠다’가 20.3%로 집계됐다고 이날 밝혔다. 그러나 외고·자사고 관련자(교원, 학부모 등)가 소수인 점을 감안하면 30% 가까운 ‘유지’ 응답률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외고·자사고 측의 반발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자사고 학부모뿐 아니라 자사고와 외국어고 교장들도 잇따라 기자회견을 열어 외국어고·자사고 폐지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한국사립초중고교법인협의회와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 등 사립학교 관련 단체들도 성명을 내고 외국어고·자사고 폐지 반대 진영에 힘을 실어줬다. 오는 28일로 예정된 서울시교육청의 일부 외국어고·자사고 재지정 평가 결과 발표를 앞두고 이 같은 갈등은 당분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자사고 폐지 반대 거리 시위 자율형사립고 학부모연합회 회원 2000명이 26일 자사고 폐지 반대를 촉구하며 서울 종로구 서울특별시교육청 앞에서 집회를 하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남정탁 기자


◆‘수월성’ vs ‘형평성’, 양측 핵심 논거는?

교육부에 따르면 전국에 외국어고는 31개교, 자사고는 46개교가 있다. 전국 2353개 고교 중 이들 학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3.6%에 불과하다. 교육의 형평성을 강조하는 외국어고·자사고 폐지 찬성 진영은 최상위권 대학 진학자 중 이들 학교 학생이 차지하는 비중이 학교 수에 비해 지나치게 커 고교 서열화를 조장한다고 지적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지난해 서울대와 연세대, 고려대 입학생 1만1812명의 출신고 유형을 분석한 결과 일반고 출신이 5940명(50.3%)으로 가장 많았고, 외국어고·국제고는 1546명(13.1%), 자사고와 자율형공립고를 포함한 자율고는 2272명(19.2%)이었다. 학교 수를 고려하면 외국어고·자사고 학생들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셈이다.


외국어고·자사고 비판의 또 다른 축은 이들 학교 입시 준비로 사교육이 과열된다는 점이다. 서울시교육청 교육연구정보원이 최근 발표한 ‘고교 유형에 따른 서울시 학부모의 사교육비 지출의 종단적 분석’ 논문에서는 특목고·자사고 학생들이 중·고교 때 모두 일반고 학생들보다 사교육비를 많이 지출한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에 수월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외국어고·자사고 폐지 반대 진영은 고교 교육의 다양성을 강조한다. 이성호 중앙대 교수(교육학)는 “외국어고·자사고는 우리나라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고 학생과 학부모들의 선택권을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분명히 의의가 있다”며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폐지한다면 명문으로 불리는 일반고도 모두 없애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어고·자사고 폐지가 학생들을 ‘강남 8학군’ 등 특정지역으로 몰리게 해 지역 간 교육격차를 심화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만기 유웨이중앙교육 교육평가연구소장은 “고교 내신 절대평가 전환 여부에 따라 외국어고·자사고 폐지가 교육현장에 미칠 영향은 달라질 것”이라며 “만약 내신이 절대평가되면 상위권 학생들이 교육여건이 우수한 강남 등 일부 지역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폐지 절차 간단… “그래서 더 신중해야”

정부가 외국어고·자사고를 폐지하려면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해 특목고와 자사고의 설립 근거 조항을 삭제하고, 고교 유형에 따른 선발시기를 규정한 내용을 없애면 된다. 현재 특목고와 자사고는 전기고로, 일반고와 자공고 등은 후기고로 분류돼 학생을 따로 선발하고 있다.

대통령령인 시행령 개정은 대통령 의지만으로도 개정이 가능하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외국어고·자사고 폐지를 공약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방법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교육부 관계자는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서 국정과제로 외국어고·자사고 폐지를 채택하면 관련법 시행령 개정으로 외국어고·자사고의 일반고 전환 근거를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20일 오전 서울시교육청에서 ‘새 정부 교육정책에 대한 제안’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외국어고·자사고 폐지 절차가 간단한 만큼 반대 여론을 고려해 존폐 여부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위원장 출신인 정진후 전 국회의원(정의당)은 지난 25일 “외국어고·자사고의 일괄폐지 선언은 교육개혁 기회를 날려버리는 망발이 될 수 있다”며 고교 입시 일정 통합, 재지정 평가를 통한 일반고 전환, 외국어고·자사고 설립 근거 법률 폐지 등 3단계 폐지 방안을 제시했다.

김경회 성신여대 교수(교육학)는 “외국어고·자사고를 폐지해도 일반고가 살아난다는 보장이 없다”며 “우수한 학생들이 외국어고·자사고에 몰린 원인을 분석해 일반고에 도입하는 게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김용련 한국외대 교수(교육학)는 “정부가 교육개혁을 추진할 때마다 사회적 저항에 부딪히며 공회전을 해왔는데, 서열화한 대학체제 개선 등이 외국어고·자사고 폐지와 맞물려 진행돼야 이를 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주영·송민섭 기자 buen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