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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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불법 정치 개입' 파문] 보고서마다 18대 대선 언급 … 검·경에 ‘野 선거사범 엄단’ 주문

야당 정치인 표적 수사
국가정보원이 이명박정부 청와대에 전달한 보고서는 우상호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등 당시 야당 정치인 동향 사찰, 검찰과 경찰을 동원한 ‘청부 수사’, 이명박 대통령 이미지 컨설팅 등 정보기관이 저지를 수 있는 불법과 탈법을 총망라하고 있다. 특히 모든 보고서에서 ‘18대 대선’을 반복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청와대에 건의한 사안들의 최종 목적이 보수 정권 재연장에 맞춰져 있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첨부된 선거사범 수사상황 국가정보원이 2011년 10·26 재·보궐 선거 직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10·26 재보선 선거사범 엄정처벌로 선거질서 확립’ 보고서. 국정원은 야권·좌파의 선거법 위반 혐의를 엄단해야 한다며 검찰과 경찰의 수사 현황을 첨부했다.
◆야당 원내대표 사찰… 도·감청 배제 못해


국정원은 ‘우상호, 좌익 진영의 대선 겨냥 물밑 움직임에 촉각’이란 보고서에서 “민주당 우상호 전 의원은 최근 주변에 ‘박원순 캠프 대변인으로 활동해 보니 좌익 진영이 오래전부터 차기 집권 전략을 세워놓은 것 같다’고 언급”한 사실을 청와대에 보고했다. ‘좌익 진영’이란 표현은 보고 대상인 청와대를 감안해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은 우 전 대표가 “그간 청춘 콘서트·나꼼수 등 선동적 방식으로 정부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불만을 자극해 ‘변화를 요구하는’ 토대를 조성했다”, “후보 선출 시기에는 야권 연대를 내세워 국민들의 관심을 유발하고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좌성향 유권자들을 하나로 묶을 것”이라고 발언한 사실을 옮겼다. 국정원은 또 우 전 대표가 “선거운동 기간에는 오랜 기간 구축해온 온·오프라인 네트워크를 가동해 ‘선거를 통한 사회변혁’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무당파(20∼30대·중산층 이하)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등 시나리오대로 전개된 것”이라고 말했다는 내용도 담았다.

국정원은 이 같은 내용을 토대로 “좌익 진영이 이번 선거를 통해 이러한 선거전략의 파괴력을 확인했다”면서 “대선까지 남은 기간 동안 무당파를 주 타깃으로 설정해 선동을 지속해 충성도·결집력을 강화해나가는 데 주력할 것”이란 예측을 적시했다. 또 “조만간 급물살을 탈 야권연대에서는 일정 지분 확보를 추진하되 기존 정당정치 체제에 편입되지 않는 선에서 거리를 두려 할 것으로 전망된다”고도 내다봤다.

주목되는 부분은 국정원의 우 전 대표 발언 수집 방법이다. 국정원이 우 전 대표 측근 등을 접촉해 확보했을 수 있지만, 발언이 상세하다는 점에서 통신을 도·감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정원은 2015년 7월 이탈리아 보안업체에서 휴대전화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한 정황이 드러났지만, 프로그램 구매 담당 국정원 직원이 숨진 채 발견되면서 사건은 유야무야된 바 있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휴대전화 감청은 쉽지 않다”면서 “정보 수집 대상의 휴대전화를 복제해 통화나 문자를 실시간으로 들여다보는 방법이 일반적”이라고 전했다.

‘손학규 대표, 서울시장 후보로 외부 인물 영입에 주력’이란 보고서는 “한명숙 전 총리가 후보가 될 경우 친노·문재인의 정치적 입지가 공고화돼, 자신(손학규)의 대선 주자 위상을 심각하게 위협할 것인 만큼 80년대 시민운동 당시부터 친분을 쌓아온 박원순은 물론 조국·안철수 등 유명인들을 은밀 접촉해 출마 의사 타진에 착수했다”는 야권 동향을 수집해 청와대에 보고했다.

◆국정원, 검경의 야권 수사 종용

국정원 ‘10·26 재보선 선거사범 엄정 처벌로 선거질서 확립’ 보고서는 사실상의 표적 수사, 청부 수사를 요구하고 있어 주목된다. 국정원은 “10·26 재보선에서 야권·좌파의 선거법 위반 행위가 집중 자행됐다”고 규정한 뒤 “철저한 수사·엄단을 통해 경종(을 울리고), 갈수록 악성화되는 선거 불법을 차단해야 한다”고 청와대에 제안했다. 국정원은 특히 “내년 양대 선거를 앞두고 민심 왜곡을 초래하는 허위사실 유포 등 불법행위를 일벌백계해 야당·좌파의 법치·공권력 경시 풍조 확산을 차단해야 한다”고도 적시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검경 지휘부에는) 야당·좌파의 ‘표적수사’ 등 여론 왜곡이 우려되므로 수사 독려 사실은 보안”에 붙일 것을 각별히 당부한 점이다. 이어 “논란 중인 SNS 불법선거 단속에 대한 ‘표현의 자유 제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악의적 유언비어 유포 및 ‘투표 당일 선거운동’ 등에 단속이 한정된 점과 후보 지지 표시 없는 ‘인증샷’ 등을 폭넓게 허용하고 있음을 부각”할 것을 제안했다.

이 보고서는 국정원이 그간 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활동을 서슴없이 해왔음을 짐작케 한다. 국정원은 이 보고서 뒤에 ‘서울시장 보선 관련 주요 수사 현황’이란 문서를 첨부했다. 국정원이 검경이 진행 중인 수사 현황을 어떻게 확보했는지도 의문이다.

이미지 개선 제안 국가정보원이 2011년 10·26 재보선 직후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2040세대의 대정부 불만 요인 진단 및 고려사항’ 보고서. 국정원은 20∼40대가 선거 때마다 야권 후보로 쏠림을 보인다면서 ‘불통’ ‘독단’ 등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를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대통령 이미지 컨설팅까지


국정원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위해 ‘이미지 컨설팅’을 수행한 보고서도 나왔다. 당시는 이 전 대통령의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국정 운영의 동력을 상실하고 있던 상황이다. ‘2040세대의 대정부 불만 요인 진단 및 고려사항’이란 이 보고서는 “20·30·40대가 주요 선거마다 야 후보로 급격한 쏠림을 보이는 등 지지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진단한 뒤 “세대별 민심 이반의 원인 진단과 함께 지지 회복을 위한 대응 방향을 강구했다”고 소개했다. 이 보고서는 국정원이 11월2일 여론조사업체 R&R를 통해 20∼50대 각 세대별 300명씩, 총 12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결과를 토대로 작성됐다.

국정원은 “대통령님과 관련해 연상되는 이미지로는 ‘추진력·리더십 보유’, ‘외교로 국가위상 제고’, ‘근면·성실’ 등을 긍정적인 면으로 꼽은 반면 부정적 이미지로는 ‘대기업·부자 대변’,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 ‘성과에 집착해 밀어붙이는’ 등이 주로 거론됐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이에 대해 “‘일로서 승부하는’ 저돌적 면모가 종북좌파들의 레토릭 공세 속에 ‘불통·독단’ 등 부정적 이미지로 변질된 측면이 있다”면서 “국민들이 기대했던 것은 ‘공감’과 ‘위로’였으나, 국민정서를 고려하기보다는 지나치게 경제논리와 합리성을 강조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서운함을 유발했다”고 분석했다.

국정원은 따라서 “젊은층과의 접촉 빈도를 높이되 ‘경청 모드’ 속에 ‘곧은 말씀’보다는 위로와 공감에 초점을 맞춰 정서적 효과를 제고”할 것을 제안했다. 또 “수용 불가한 민생 요구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시시비비는 자제하고, 진솔하고 완곡한 레토릭을 통해 국민의 이해를 구하는 등 민생화법 전환을 해야 한다”는 점을 청와대에 조언했다.

특별취재팀=조현일·박현준·김민순 기자 hjunpar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