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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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인프라 민영화 붐 … 돈벌이 전락한 SOC 사업

美, 사회기반시설 민영화 확산
도로, 다리, 터널, 항만 등 사회기반시설(infrastructure)은 전통적으로 국가나 정부가 관리하는 공적 재산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연방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예산 부족을 이유로 인프라 구축사업을 민간분야에 넘기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이제 민간기업 등이 도로 등 주요 교통시설을 수익사업으로 운영하고, 주민은 요금을 내고 이를 이용하는 고객으로 전락하고 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1조달러(약 1125조원) 규모의 미국 인프라 구축사업을 민간에 위탁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어 사회기반시설 민영화작업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전역에서 널리 확산하고 있는 인프라 민영화의 실태를 심층 진단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인프라 재건 프로젝트를 강조하면서 삽질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프라의 민영화 붐

미국의 대통령과 주지사 또는 시장 등이 고속도로, 다리, 터널, 수로 등을 신설하면 주민생활이 편리해지기 때문에 박수를 받게 마련이다. 문제는 연방정부나 지자체가 인프라 확충과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할 예산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민·관 공동 프로젝트로 미국 전역에 걸쳐 인프라를 대대적으로 단장하겠다고 공언했다.

백악관은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 전역에서 520개의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가 추진되고 있다고 최근 밝혔다. 고속도로 신설, 도로 확장, 다리 건설 등에는 막대한 재원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트럼프 정부는 초기 투자비용을 정부가 일단 조달하고 민간기업 등이 인프라를 건설한 뒤 이용료 등으로 인프라 건설비용을 충당하고 수익사업을 하는 소위 ‘P3s’ (public-private partnerships) 모델을 추진하고 있다.
3Ps로 진행되고 있는 버지니아주 햄튼 로드 다리 건설 현장.

미국도시공학협회(ASCE)는 미국의 도로, 다리, 항만, 수로 시설을 정비하는 데 4조6000억달러의 예산이 필요하다고 최근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천문학적인 재원을 조달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 미국 연방과 지방 정부가 인프라에 민간 투자자금을 유치해 이 문제를 해결하려 들고 있다.
◆초대형 글로벌 사모펀드의 등장

미국 등에서 초대형 인프라 프로젝트 붐이 조성됨에 따라 이 같은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글로벌 투자기금 등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민간 연구기관인 프레퀸(Preqin)은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인프라 건설 투자를 목적으로 10억달러(약 1조1250억원) 이상의 자본금을 가진 사모펀드가 84개에 달한다고 밝혔다.

특히 400억달러의 자본금을 확보한 미국의 인프라 투자 회사인 블랙스톤에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가 최근에 200억달러를 투자했다. 블랙스톤은 이 같은 자본금을 기반으로 미국에서 1000억달러가 넘는 인프라 구축사업을 할 계획이라고 시사종합지 애틀랜틱 최신호가 보도했다. 블랙스톤과 같은 기업은 특정 고속도로나 유료 도로, 다리 등을 단독으로 소유하거나 운영하기보다는 별개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이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글로벌 인프라 파트너스(GIP)라는 기금은 올해 1분기에만 158억달러의 자본금을 모았다. 그러나 사우디의 투자를 받은 블랙스톤에 이 분야 1위 자리를 내주었다. 현재 미국 등 북미지역 인프라 투자를 위해 마련된 자금이 710억달러에 달한다고 프레퀸이 밝혔다.

◆인프라 투자의 명암

대형 사모펀드는 대체로 인프라 투자가 주식 투자보다 수익성이 좋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젝트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엇갈리고 있다. 스페인의 이소룩스(Isolux) 펀드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인디애나주지사로 재임하던 시절 이 주를 가로지르는 69번 고속도로 건설사업을 주관했다. 이소룩스는 이 사업에 4050만달러만 투자하고, 회사채 발행을 통해 2억52000만달러를 조달했다. 그러나 이 사업에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 주관사는 부도 위기에 올렸고, 인디애나주는 지방채를 발행해 이 사업을 떠안았다. 또 다른 스페인 인프라 투자 펀드인 신트라(Cintra)는 텍사스주 130번 유료 도로에 투자했다가 파산보호신청을 했다.

반면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카타르 국부펀드의 투자를 받아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시 도로 주차 관리시설을 인수해 대박을 터뜨렸다. 이 컨소시엄은 11억달러를 내고, 3만6000개에 달하는 유료 주차미터기 운영권을 인수했고, 앞으로 3년 내에 투자금을 모두 회수할 수 있게 됐다고 애틀랜틱이 보도했다. 이 컨소시엄은 앞으로 60년 동안 이 주차시설 운영권을 쥐고 있어 2015년 기준으로 연간 1억5600만달러의 이익을 거둘 것이라고 이 매체가 전했다.

◆시민은 인프라의 고객으로 전락

공공시설의 민영화 바람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호주, 캐나다, 영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도로, 다리 건설 프로젝트를 민간에 넘겼고, 공항이나 항만 운영권도 민간업체에 맡기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이 모델을 벤치마킹해 미국의 낙후한 사회기반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다.

그러나 주요 인프라의 민영화에 따른 문제가 속출하고 있다. 우선 주민의 경제적 부담이 늘어나고 있다. 민간기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투자금을 신속하게 회수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도로, 터널, 다리 등의 이용료를 인상하게 마련이다. 정부가 인프라 구축사업을 주관할 때는 주민의 복지와 이익을 위해 이용료를 최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컨소시엄이 이를 시행하면 거의 예외 없이 정부가 운영할 때보다 이용료가 오른다.
미국 인프라 재건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뉴욕 펜 스테이션 역.

민간 컨소시엄이 투자할 때는 금융비용이 정부가 주관할 때보다 더 많이 드는 것도 문제점 중 하나다. 미국에서는 정부가 프로젝트를 추진하면 약 3%의 이자율로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지만 민간 컨소시엄이 투자할 때에는 그 투자 위험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에 대출이자가 이보다 올라갈 수밖에 없다. 투자금이 늘어나면 그 부담은 소비자인 주민에게 전가된다.

미국의 민주당과 진보진영은 사회기반시설의 민영화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1조달러 인프라 구축사업에도 민주당이 제동을 걸고 있다.

민간 컨소시엄이 투자할 때에는 수익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인구가 많은 대도시에 프로젝트가 편중되게 마련이다. 백악관에 보고된 46개의 교통시설기반 구축 프로젝트 중 시골에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신고한 건수는 알래스카주의 2건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골 백인의 지지를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됐기 때문에 전국 단위의 인프라 구축사업을 추진하면서 자신의 핵심 지지층이 소외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추진하는 인프라 구축사업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6개월이 지났으나 러시아 스캔들 등으로 국정동력을 상실함으로써 초대형 사업을 밀어붙일 수 있는 역량이 남아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워싱턴=국기연 특파원 ku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