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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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개인 자유 침해·정부 반감에…커지는 백신 부작용 '맹신'

유럽 중심 백신 반대운동 논란
세계보건기구(WHO)는 지난달 11일(현지시간) 지난해 유럽 전역에서 홍역으로 숨진 아이가 모두 35명에 이른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사망자는 모두 홍역 백신을 맞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고 이 중 31명이 루마니아 아동인 것으로 나타났다. WHO는 홍역 백신 접종을 꺼리는 원인으로 ‘백신 반대 운동’을 지목했다. 경제적 이유 등이 아니라 백신 접종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심리가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다. 실제 루마니아에서는 TV진행자 출신의 올리비아 스티어 등 유명 인사들이 “백신에는 수은과 알루미늄이 들어있고, 이는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주장하고, 루마니아 정교회 역시 부모가 백신을 거부할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밝히는 등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WHO 유럽 담당관 주자나 자카브 박사는 “백신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질병으로 생긴 이런 비극은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다”고 말했다.



유럽을 중심으로 백신 반대 운동이 확산하고 있다. 이탈리아, 프랑스 등 부모에게 어느 정도 백신 접종에 관해 선택권을 부여했던 국가들이 최근 백신 접종 의무화 정책을 도입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이다. 백신에 반대하는 이들은 자폐증 등 부작용이 없다는 사실이 검증되지 않은 데다 자연적으로 면역력을 키울 수 있다며 정부가 이런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의학 전문가들은 백신을 접종하는 것이 자기 아이의 건강에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면역력이 약한 다른 아이에게 질병을 옮기지 않는 확실한 방법이라며 백신을 꼭 맞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탈리아 한 시민이 지난달 22일(현지시간) 로마 시내에서 백신의무접종법안 통과에 반대하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로마=AP연합뉴스
◆‘백신 반대 운동’ 확산 속 홍역 등 발병↑

영국 인디펜던트, NPR 등 외신에 따르면 프랑스는 지난달 모든 아동에게 11개 종류의 백신을 접종하는 법안을 2018년부터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2만4000여명의 아동이 홍역에 감염된 상황을 더는 두고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그간 디프테리아, 파상풍, 소아마비 등 3개 질병에 대해서만 백신 접종을 의무화했다. 에두아르드 필리페 프랑스 총리는 “백신을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에서 홍역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하원 역시 지난달 28일 6세 이하 아동에게 백신 10종을 의무적으로 접종하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홍역, 풍진, 파상풍 등이 포함됐으며 백신을 맞지 않는 아동은 유치원 등교가 금지되며 백신을 맞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등교시킨 부모에게는 500유로(약 66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부모가 백신 접종을 거부할 경우 양육권을 박탈하는 등의 강경한 방침도 담겼다. 이탈리아 역시 2세 이하 아동의 홍역 백신 접종률이 2013년 88%, 2014년 86%, 2015년 85.3%를 보이며 지속적으로 하락, 2년 전 대비 홍역 발병 건수가 10배 이상(2500여건) 증가하는 등 보건위기를 겪고 있다.

올해 7월 기준 홍역 접종률이 80%를 밑돌고 있는 루마니아는 백신 반대운동은 물론 부정부패와 경기 침체로 백신 재고율마저 하락하면서 신생아 1000명 중 11명이 사망하는 등 유럽 내 가장 높은 유아 사망률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서도 지난 5월 미네소타주 헤네핀 등에서 소말리아 출신 이민자를 중심으로 48명이 홍역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돼 보건 당국을 긴장시켰다. 2015년 캘리포니아주 디즈니랜드에서 집단 홍역이 발병한 이후 2년여 만에 홍역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주정부 측은 백신 접종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소문이 소말리아 출신 이민자들 사이에서 퍼진 점이 집단 홍역 발병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백신 반대 운동 현황과 이유는

백신 반대 운동은 1998년 영국 의사 앤드루 웨이크필드가 의학전문지 ‘랜싯’에 홍역·볼거리·풍진을 예방하는 MMR 백신이 자폐증의 원인이 된다는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이후 그의 연구가 조작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웨이크필드는 2008년 면허가 박탈돼 의료계에서 퇴출됐다. 하지만 백신이 자폐증을 유발한다는 그의 주장은 모델 제니 맥카시, 백신반대 단체 ‘자폐증의 시대’ 등을 통해 퍼지면서 확대재생산됐다. 웨이크필드는 면허가 없는 상태에서도 지속적으로 백신의 위험성을 강조하는 강연을 개최해 지난 5월 미네소타 홍역 발병 사태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히 지난 2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폐증에 걸린 아이들이 갑자기 늘어나고 있다고 밝혀 미국 내 백신에 대한 공포를 부추겼다.

이탈리아에서는 포퓰리즘 정당 오성운동의 설립자 베페 그릴로가 1998년부터 “백신이 아이들의 면역 시스템을 약화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최근에는 자폐증 원인 중 하나가 백신 접종이라며 백신 거부 운동을 자극했다. 오성운동은 백신 접종 거부를 주장하진 않지만 백신 반대 운동도 시민들의 목소리 중 중요한 부분이라며 백신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백신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대중 사이에도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프랑스 국민 6만50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1%가 ‘백신은 안전한가’라는 질문에 부정적으로 답했다. 영국에서는 지난 4월 백신 의무 접종을 강요하는 정책의 변경을 요구하는 청원에 4만여명이 서명하기도 했다.

백신을 거부하는 입장에는 단순히 자폐증 및 수은 중독과 같은 부작용에 대한 우려와 함께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정부에 대한 반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하이디 라르손 워싱턴대 교수는 설명한다. 여기에 대형 제약업체가 백신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거두고, 자연스럽게 면역을 키우면 백신을 맞지 않아도 된다는 ‘자연주의’ 역시 백신 반대 운동의 한 요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백신 접종은 개인과 공동체 모두를 위한 일”

WHO와 보건 전문가의 말을 종합하면 백신 접종을 피하는 것은 쉽게 예방할 수 있는 질병에 아이를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킬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안전을 해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우선 2014년 120만여명의 아동을 대상으로 전수조사한 결과 MMR백신과 자폐증 사이에 아무런 연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 여러 백신에 수은을 함유한 방부제 티메로살이 섞여 있어 아이들 뇌에 악영향을 미쳤다는 주장 역시 티메로살이 현재 백신 성분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근거가 없다. 오히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에서 6세 이하 아동이 MMR백신, 백일해 백신 등을 의무적으로 접종한 결과 1994~2013년 73만여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3억220만건의 발병을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WHO는 “백신은 매년 200만~300만명의 아이들을 죽음의 문턱에서 구해낸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백신 거부는 공동체 보건 안전을 위협한다는 측면에서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뉴욕에서 소아과를 운영하는 의사 다이언 헤스는 필수 백신을 맞지 않은 아동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는 “나는 환자들의 건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늘 약속한다. 그런데 암, 백혈병이 발병해 면역력이 약해진 환자가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데 백신 접종을 맞지 않아 홍역 바이러스를 가진 아이가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면 내 약속을 지킬 수가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미국 CDC의 앤 슈체트 연구원은 “홍역은 보균자가 앉아 있는 자리에만 있어도 걸리기 쉽다. 환자의 25%가 병원에 입원하는 등 심각하게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백신 접종률을 높이면 자연스럽게 면역력이 약한 아이들도 감염 위험이 낮아지는 ‘집단면역’(herd immunity)을 구축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백신 거부는 사회적으로 악영향을 미친다고 BBC방송은 전했다. 영국 가디언은 ‘자마 피디아트릭스’를 인용, 미국의 2~11세 아동의 MMR백신 접종률이 5% 낮아질 경우 그렇지 않을 때보다 발병건수는 3배 증가하고, 최소 210만달러의 손실이 발생한다고 지적했다.

백신 접종에 반대하는 이들을 무조건 비난하기보다 소통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시각도 있다. 게리 피네건 백신 투데이 편집장은 “호주에서는 ‘나 면역력을 갖다’(I immunise)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민들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백신의 중요성을 서로 얘기해주고 지식을 나누는 기회를 마련해 백신 접종률 제고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고 포브스는 전했다.

이희경 기자 hjhk3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