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여느 때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 한 중년 남성이 불쑥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대뜸 허벅지를 만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몸은 얼어붙었다.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종종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간 뒤 현관문을 잠그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불행 중 다행인지 문제의 남성이 쫓아오진 않았다.

지인 A씨가 최근 말로만 듣던 ‘길거리 성추행’을 당했다며 털어놓은 얘기다. 늦은 시간도 외진 곳도 아니었다고 한다. 뒤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A씨는 말했다. 왜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도 경찰을 부르지도 않았냐고 묻지 못했다. A씨가 스스로 더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물지 않은 상처만 덧내는 일일 테니.

박진영 사회부 기자
이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란 생각이 엄습했다.

길거리 성추행은 A씨만의 일이 아니어서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겪을 수 있다.

경기도가족여성연구원이 2015년 경기도에 사는 성인 남성 758명과 여성 742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 결과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조사에서 여성 4명 중 1명(전체 25.9%)이 도로나 지하철 등 길거리에서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남성의 응답률은 2.9%에 그쳤다.

공공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에게 추행을 당했을 때 조치를 취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라고 성추행범을 향해 큰 목소리로 따지면서 주변에 피해 사실을 알리고 112에 신고해 그를 현행범으로 입건할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적극적 대응을 주저하는 성범죄 피해자들이 적지 않은 건 이들이 손가락질을 받으며 2차 피해를 보는 현실과 무관치 않다.

A씨는 어머니에게 그날의 경험을 토로했다가 “요즘 젊은 여성들의 옷차림이 문제”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성범죄의 원인과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는 건 엄연한 2차 가해다. 이런 왜곡된 통념은 피해자들의 즉각적인 상황 판단과 대응을 어렵게 한다. 적반하장 격으로 피해자를 무고나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해 피해자로 둔갑하는 가해자들이 존재하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길거리 괴롭힘(street harassment)’ 추방 운동가인 홀리 컬은 현장에서 어떤 행동이든 일단 시도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지금 무슨 짓입니까?”,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와 같은 식으로 성추행범에게 ‘당신이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알려 주거나 하다못해 그를 똑바로 쳐다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컬은 또 피해자가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으려면 목격자와 주변인들의 적절한 개입과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법적 처벌과는 별개로 수치심이나 자책감을 비롯한 마음의 짐은 성범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떠안아야 한다. 가해자들이 떳떳하지 못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건 구성원들의 몫이다. 공공장소에서 성범죄를 목격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피해자와 같은 편이 돼 분노하고 싸워주는 노력이 하나둘 쌓이면 언젠가는 길거리에서 성추행범을 퇴출할 수 있을 것이다. 성범죄 피해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회적 공감대는 그 출발점이다.

박진영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