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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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기상이변 갈수록 느는데… 거꾸로 가는 美 '기후정책'

트럼프 대통령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공식화에 국내외 우려 고조
중동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쓰나미가 몰려든다. 냉대기후 지역인 모스크바는 폭염에 노출되고, 아열대인 홍콩에선 용암이 분출한다. 20일(현지시간)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개봉된 할리우드 재난 블록버스터 ‘지오스톰’이 다룬 대재앙의 모습이다. 영화는 인공위성 조직망을 이용해 날씨를 조정하는 프로그램의 오작동으로 발생한 대재앙을 다뤘다.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미국의 일부 과학전문지는 단순한 방법으로 심각한 문제를 다뤘다고 평가했다. 세계적인 문제라는 점을 알리려는 듯 출연 배우의 국적은 미국과 중국, 쿠바 등 10개국이 넘는다. 개봉일은 예정보다 몇 개월 연기됐다. 허리케인이 잇따라 미국을 강타하자 배급사가 내린 조처였다. 영화가 다룬 ‘두려운 미래’는 일정 부분 미국이 직면한 ‘오늘의 문제’이기도 하다. 올해처럼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한 때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5월 말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 방침을 확인했다. 국제사회의 우려는 그만큼 크다.
허리케인 '어마'
◆허리케인, 산불, 가뭄… 자연재해 이어지는 미국

미국으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자연재해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해마다 새로운 기록을 양산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에서는 한겨울에 무지개가 떠올랐다. 그 1년 전엔 2주일 넘게 동부 지역에 폭설이 쏟아졌다. 미국이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공식화한 올해는 자연재해가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숫자가 이를 증명한다. 22일 미 국립해양대기청(NOAA)에 따르면 올해 미국에서 발생한 토네이도는 1391건에 달한다. 지난 10월8일이 기준이므로 올해가 2개월 넘게 남았지만, 이 수치만으로도 지난해 발생한 1059건을 훌쩍 뛰어넘었다. 토네이도만이 아니다. 허리케인을 비롯해 가뭄, 산불, 홍수, 해일 등도 거의 사상 최악 수준을 기록했다.

올해 들어 10억달러(약 1조1330억원) 이상의 피해를 낸 자연재해만 16건에 달한다. 최근 2개월 사이 발생한 대형 허리케인도 5건에 달한다. ‘하비’(8월17일∼9월2일)를 시작으로 ‘어마’(8월30일∼9월12일), ‘호세’(9월5일∼22일), ‘마리아’(9월16일∼30일), ‘네이트’(10월4일∼9일)에 이르기까지 여러 허리케인이 미국 동남부와 남부를 번갈아가며 할퀴었다.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와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어마는 모두 9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잠정적인 피해액만 최대 920억달러(104조1900억원)에 이른다. 8월 말 텍사스주를 강타했던 하비는 84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1900억달러(약 215조1750억원)에 달하는 피해를 남겼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로자의 유명 와이너리인 ‘파라다이스 리지’의 와인 오크통들이 대형 산불에 까맣게 탄 채 흉물스럽게 남아 있다.
샌타로자=AP연합뉴스

건조한 서부에서는 산불이 번지고 있다. 지난 8일 발생한 캘리포니아주 북부 지역의 산불은 아직도 잡히지 않았다. 이 산불로 숨진 사람은 최소 42명에 달하고, 현재까지 알려진 재산 피해액만 650억달러(약 73조6125억원)다. 미국에서 발생한 산불로는 역대 최대 피해를 안겼다. 보름 가까이 이어진 산불에 캘리포니아주는 1만1000명이 넘는 소방대원을 진화에 투입했다. 인근 주정부에서 소방대를 지원하고, 호주에서도 소방인력을 지원했지만 산불은 아직도 타고 있다. 캘리포니아주의 긴장감은 최근 다시 고조됐다. 북부 지역의 산불이 타고 있는 가운데 21일 특급 산불 경계령이 내려진 것이다. 이번엔 로스앤젤레스(LA) 동·서부 지역인 산타바바라 카운티와 샌버나디노 카운티에 경계령이 내려졌다. 낙엽이 쌓이고 건조한 기후가 지속돼 산불이 발생하면 피해가 극심할 것이라는 경고이다.

◆해마다 증가하는 피해

자연재해 후폭풍은 엄청나다. 하비와 어마, 마리아가 휩쓸고 간 텍사스주, 플로리다주, 조지아주 등에서는 주민들이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일례로 하비가 휩쓸고 간 텍사스주 아란사스 카운티는 주민 2만4000명 가운데 6000명이 집을 잃어버려 상심해 있다. USA투데이 등 미 언론은 소방당국의 복구지원이 이어지고 있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아직도 수돗물과 전기마저 공급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1개월 넘게 복구작업을 하고 있는 텍사스주 락포트 주민 드보라 제임스(65)는 “하비가 휩쓸고 간 뒤 어마가 플로리다주와 푸에르토리코에 큰 피해를 주면서 우리는 관심 대상에서조차 벗어났다”며 “그나마 대도시인 휴스턴에 관심을 둘 뿐 우리는 소외됐다”고 안타까워했다. 관광지로 유명한 플로리다주와 캘리포니아주엔 외지인의 발길도 끊겼다. 크루즈와 놀이공원, 해수욕장 이용객이 넘쳐야 할 플로리다주는 전에 없이 한산한 모습이다. 캘리포니아주도 마찬가지다. 와인 농장은 사실상 올해 농사를 포기했으며, 요세미티 등 국립공원을 찾는 관광객의 발걸음은 뜸해졌다.

NOAA는 자연재해가 잦은 원인으로 지구온난화 등 기후변화를 원인의 하나로 지목한다. 올해 지구의 평균 기온은 지난 9월까지를 기준으로 20세기 평균 화씨 59도(섭씨 15도)보다 1.57도 높았다. 이는 평균기온 관측이 시작된 1880년대 이후 두 번째로 높은 기온이다. 지구온난화 흐름은 최근 몇 년 동안 발표된 수치에서 확인된다. 지금까지 1~9월 평균기온이 가장 높았던 해는 2016년이었다. 평균기온이 높았던 ‘상위 10개년’은 한 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2005년 이후다.

◆‘뉴 노멀’(새로운 기준)의 도래… 트럼프 정부의 기후정책 ‘유턴’

지구온난화로 최근 100년 사이 지구의 해수면은 20㎝ 상승했다. 허리케인 등 폭풍의 공급 연료가 그만큼 풍부해진 것이다. 바닷물이 따뜻하고 바람의 속도가 빠를수록 허리케인이나 태풍은 점점 세력을 키우게 된다. 포츠담기후영향연구소의 앤더스 레버만은 “물리학은 매우 명확하다”며 “허리케인은 바다의 열에서 파괴적인 에너지를 얻는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인식에는 미국 과학계도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지구온난화와 자연재해 발생에 직접적인 관계는 확인된 게 없다. 과학적인 증거와 설명도 부족하다. 하지만 자연재해의 강도를 더하고 있다는 점은 공유되는 인식이다. 지구온난화가 허리케인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기후변화가 최소한 허리케인의 ‘몸집 키우기’엔 힘을 보탰다는 것이다.

기후변화가 최소한 자연재해 피해를 키우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인식은 여러 파장을 야기하고 있다. 당장 전임 버락 오바마 정부의 방침과는 달리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를 공식화한 트럼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야당과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이 날씨의 ‘뉴 노멀’로 자리 잡으면서 지구적인 대책이 필요한 때에 미국이 정반대의 행로를 보인다는 비판이다. 트럼프 정부는 빈번한 자연재해 발생은 복합적인 요인 때문이라는 입장이지만, 발언의 강도가 예전처럼 강하지 못하다. 허리케인이 미국 일부 지역을 잇따라 강타하자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최근 파리기후변화협정이 미국에 유리하게 수정되면 탈퇴 방침을 번복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앞으로도 자연재해가 올해처럼 자주 발생하면 트럼프 정부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워싱턴=박종현 특파원 bal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