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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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6년 쌓은 모정(母情), 어느덧 3000기

강릉 노추산 모정탑
사남매 중 두 아들을 앞세운 어머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애끊는 모정을 담아 탑을 쌓는 일뿐. 산 중턱에 움막을 짓고 탑을 쌓았다. 사연을 들으면 누구도 지나칠 수 없다. 하나, 둘 돌을 보태어 그의 염원을 응원하다.


찢길 대로 찢기고,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치유될 리 만무하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지만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자식 잃은 어미의 고통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싶다.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단장(斷腸)’이란 말이 그나마 자식을 잃은 어미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는 말이다. 하나도 아니고 둘을 먼저 보냈다. 살면서 많은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니다. 그저 남편, 자식들과 오순도순 사는 것이 그의 전부였지만, 그에겐 이마저도 너무 거창한 꿈이었나보다.


강원 강릉 노추산 모정탑길엔 가족의 평안을 바라며 차옥순씨가 1986년부터 2011년까지 26년간 쌓은 3000여기의 돌탑이 있다. 이후 이곳을 찾은 지역 주민과 여행객들이 하나 둘 쌓은 돌탑이 곳곳에 있다. 누구나 돌 하나를 얹어 돌탑에 소원을 같이 쌓을 수 있다. 다른 이의 소원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해야한다. 모정탑길의 진짜 매력은 이 길을 찾는 이들이 가족을 떠올리며 걷게 하는 데 있다.
그는 이 같은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 여겼으리라 싶다. 슬하에 사남매를 뒀지만 불의의 사고로 두 아들을 잃고, 남편은 병으로 고생하는 등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던 그는 우연히 꿈에서 들은 한마디를 부여잡는다. 가정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어미로서 하지 못할 일이 있으랴.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계곡에 돌탑 3000기를 쌓으면 우환이 없어질 것이라고 하자, 어미는 바로 실행에 옮긴다.

강원 강릉 노추산엔 차옥순씨가 남편과 자식의 평안을 기원하며 1986년부터 2011년까지 26년간 쌓은 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옛날이야기에서나 들을 법한 일이지만 불과 1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노추산 모정탑길에는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 급제한 율곡 이이를 기리는 구도장원비가 있다.
노나라 대표 인물인 공자와 추나라 대표 인물인 맹자의 뜻을 기리기 위해 노추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이름답게 신라 중기의 대학자 설총과 조선 중기의 유학자 율곡 이이가 학문을 닦은 곳이다. 아홉 차례나 과거에 장원 급제한 율곡을 기리는 구도장원비(九度壯元碑)가 여행객을 맞는다. 율곡 이이가 이곳에서 수학할 때 남긴 비석이다.

율곡 이이보다 노추산을 대표하는 것은 돌탑이다. 차씨가 쌓은 돌탑이 3000기를 웃돈다. 돌탑이라고 부르면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탑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질까 봐 어머니의 정이 담긴 모정탑이라 불린다.

강릉 계곡 곳곳은 울긋불긋 단풍이 한창이다.
모정탑을 보려면 강릉노추산힐링캠프를 찾는 것이 쉽다. 캠핑장을 지나면 소나무 길이 열린다.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지는 오솔길을 따라 가면 양 옆으로 무릎 높이 돌탑이 줄줄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는 차씨가 쌓은 탑이 아니다. 차씨의 정성에 감동한 지역 주민과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이 하나 둘 쌓은 탑이다. 누구나 돌 하나를 얹어 돌탑에 소원을 같이 쌓을 수 있다. 다른 이의 소원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오솔길을 지나면 확 트인 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송천이다. 오솔길보다 볕을 많이 받는 송천 계곡 주위 나무들의 단풍 색이 더 진하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다양한 형태의 작은 돌탑들이 이곳저곳에 서 있다. 주위 풍경을 즐기며 느릿느릿 걷다 보면 이전과는 다른 어른 키만 한 다양한 형태의 돌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정탑길을 따라 가면 돌탑 언덕을 만난다. 돌탑으로 성을 쌓은 듯한 모습이다.
차씨가 쌓은 모정탑이다. 차씨의 사연을 알고 탑을 보면 자식과 가족을 향한 그의 사랑이 극진했을 알 수 있다. 연이어 나오는 3000여기의 돌탑들을 보며 ‘어머니는 위대하다’란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그렇게 10분 정도 돌탑으로 이어진 모정탑길을 따라 가면 돌탑 언덕을 만난다. 돌탑으로 성을 쌓은 듯한 모습이다. 

돌탑 언덕 안에는 작은 움막이 있다. 차씨가 돌탑 쌓을 때 기거한 움막이다.
성 안에는 작은 움막이 있다. 차씨가 돌탑 쌓을 때 기거한 움막이다. 다리를 펴고 누울 자리조차 안 되는 크기의 작은 움막에서 지내며 가족의 평안을 위해 탑을 쌓은 차씨는 2011년 운명을 달리했다. 그의 바람이 얼만큼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 들려오는 얘기로는 집안은 평온을 찾았다고 한다. 하지만 모정탑길의 진짜 매력은 이 길을 찾는 이들이 가족을 떠올리며 걷게 하는 데 있을 듯싶다.

노추산 모정탑길은 ‘올림픽 아리바우길’ 3코스에 속한다. 아리바우길은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기념해 개최 도시인 강릉과 평창, 정선을 잇는 트레킹 코스로 정선아리랑과 강릉바우길을 합친 이름이다. 정선오일장에서 경포해변까지 9개 코스 131.7㎞에 이르는 역사문화생태 탐방로다.


강릉 안반데기는 떡메로 반죽을 내리칠 때 쓰는 받침 ‘안반’과 고원의 평평한 땅을 뜻하는 ‘덕’이 합쳐진 것이다. 해발 1100m 고지에 대단위 경작지가 펼쳐진다. 동해까지 이어진 산등성이들이 이루는 울긋불긋한 파도와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모정탑길에 인근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아리바우길이 또 있다. 안반데기다. 마을 이름은 떡메로 반죽을 칠 때 쓰는 받침 ‘안반’과 고원의 평평한 땅을 뜻하는 ‘덕’이 합쳐진 것이다. 이름만큼 풍광도 독특하다. 해발 1100m 고지에 대단위 경작지가 펼쳐진다. 옥녀봉과 고루포기산 사이 198만㎡(약 60만평)에 이르는 밭이 독수리 날개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한눈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넓다.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바람은 거세다. 한두 달 전에는 고랭지 배추를 심었지만, 지금은 농사가 끝나 푸른빛은 덜하다. 동해까지 이어진 산등성이들이 이루는 울긋불긋한 파도와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이국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안반데기에는 멍에전망대 등 곳곳에 전망대가 있다. 땅을 개간하면 나온 돌로 만든 전망대에 멍에란 이름을 붙였다. 20여 농가가 거주하는 전국 최대 규모의 고랭지 채소 재배단지인 이곳의 초창기 정착민들은 돌투성이 비탈밭을 맨손으로 일궜다.

기계는 꿈도 꿀 수 없는 비탈밭에 소가 효자였다.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소의 목에 얹는 구부러진 막대를 뜻하는 멍에는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나 억압을 의미한다. 화전민들에겐 하루하루 힘들었던 삶 자체가 멍에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

강릉=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