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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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가난을 이겨낸 집념… 저 바다는 알고 있을까

남해 독일마을 / 맛 좋기로 소문난 죽방멸치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바다마을서 자연을 활용한 생존법 / 산업화 시기 외화벌이 떠났던 청춘들…희끗한 노년으로 돌아온 제2의 고향 /이젠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이역만리 타향살이 설움… 부서지는 파도에 하나씩 풀어놓는다
가난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운명이었다. 육지처럼 너른 들판이 있는 곳이 아니다. 그나마도 척박하다. 척박하더라도 땅을 개간한다면, 먹고살기가 나았겠지만 땅이 귀한 곳이다. 바다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이 바다 역시 녹록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온통 바다지만 물살이 거세 먼바다를 나가면 목숨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힘들게 물고기를 잡더라도 이를 팔려면 바다 건너 뭍까지 가야 해 돈을 벌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환경을 탓하지만은 않았다. 섬 사람들은 때로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때로는 극복하면서 삶을 이어나갔다.

◆자연을 활용한 죽방렴

경남 남해는 바다와 이름이 같다. 괜스레 특색이 없는 곳처럼 느껴지지만 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색적인 풍광에 사로잡힌다.

남해는 크게 남해도와 창선도로 나뉜다. 경남 하동에선 남해도와 연결된 남해대교가, 사천에선 창선·삼천포대교가 남해와 뭍을 이어주고 있다. 그중 사천에서 섬으로 넘어오는 다리를 건너면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독특한 풍경을 만난다. 긴 나무때기로 보이는 것들이 바다 곳곳에 꽂혀 있다. 다리를 건너며 보니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 쉽지 않다. 언뜻 보기에 오징어 또는 물고기 형태를 하고 있다. 바다에 있으니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닐까란 궁금증을 품은 채 남해로 들어선다.
경남 사천과 남해를 연결하는 창선·삼천포대교.

이 궁금증을 해결하려면 창선도와 남해도 사이 지족해협을 연결하는 다리 창선교로 향해야 한다. 지족해협은 손도라고도 하는데 목이 좁은 바닷길을 뜻한다. 지족해협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치른 울돌목 다음으로 해류가 빠른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물살이 거센 곳으로 밀물과 썰물의 차이도 심해 양식을 하기 힘들다. 대신 고정 그물인 죽방렴을 설치해 어로활동을 했다.

창선교 주변으로 남해에 들어서면서 봤던 죽방렴이 20여기 몰려 있다. 죽방렴이지만 바다에 꽂힌 나무는 참나무다. 참나무 수십 개를 ‘V’자 형태로 꽂은 후 참나무 사이사이에 대나무 발을 둘렀다. 밀물 때 그물이 처진 ‘V’ 형태의 나무 사이로 들어온 물고기는 좁은 통로를 따라 둥근 임통(불통) 속으로 몰린다. 물살이 반대인 썰물이 되면 임통의 문이 닫힌다. 물고기 입장에선 들어갈 때는 자유지만 나갈 방법은 없어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물이 빠지면 갇힌 물고기를 퍼 올리면 끝이다.
남해 농가섬을 찾으면 죽방렴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섬 속의 섬인 농가섬까지 다리가 이어져 있는데, 이 다리가 죽방렴을 가로질러 나 있어 둥근 임통 내부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죽방렴의 둥근 임통 내부 모습.

죽방렴을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예부터 자연을 이용한 어업활동이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1469년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남해 방전(죽방렴)에서 멸치·홍어·문어가 잡힌다’는 내용이 있어 그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

1960년대까진 하동·거제 등에도 있었지만, 배 운항에 걸림돌이 되고 돈이 되지 않자 자취를 감쳤다. 남해에만 남은 이 원시어업은 2010년 명승으로 지정됐다.

지족해협의 농가섬을 찾으면 죽방렴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다. 다른 죽방렴들은 바다 중간에 설치돼 배를 타고 가야지만 볼 수 있다. 섬 속의 섬인 농가섬까지 다리가 이어져 있는데, 이 다리가 죽방렴을 가로질러 나 있어 둥근 임통 내부의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다.
경남 남해 지족해협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해 고정 그물인 죽방렴을 설치해 어로활동을 했다. 죽방렴에서 새가 날개를 접고 쉬고 있다.
죽방렴에서 많이 잡히는 것이 바로 멸치다. 그 유명한 죽방 멸치가 나는 곳이다. 멸치뿐 아니라 갈치, 학꽁치, 도다리 등 남해에 다니는 다양한 물고기들이 잡히지만 그중 멸치 수가 월등해 ‘죽방멸치’가 죽방렴의 대표 어종이 됐다. 물살이 센 지족해협의 죽방렴에서 잡힌 멸치는 육질이 단단하고, 비늘이 벗겨지지 않아 오랫동안 살아 있어 싱싱하다. 이 부근 식당을 찾으면 죽방멸치로 만든 회, 조림, 구이 등을 맛볼 수 있다.

◆운명을 개척한 독일마을

1963년 12월 김포공항. 젊은 한국 남성 247명이 비행기에 올라탔다. 이들이 향한 곳은 서독행 비행기였다. 두려움과 설렘이 섞인 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발된 파독 광부들이었다. 3년 후인 1966년엔 젊은 여성들이 서독으로 떠났다. 파독 간호사들이다. 광부들은 1977년까지 7936명, 간호사들은 1976년까지 1만1000여명이 이역만리로 외화를 벌기 위해 떠났다.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와 ‘영자’가 바로 이들이다.
남해 독일마을은 이역만리 독일에서 광부와 간호사 일을 하던 젊은이들은 고국에 돌아와 이룬 마을이다. 남해군에서 부지를 제공했고, 이들은 독일식 건물을 지어 2002년부터 마을을 꾸렸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이들은 한국에 있는 가족을 위해 월급의 대부분을 꼬박꼬박 보냈고 이 돈은 당시 외화가 부족했던 조국에 큰 도움이 됐다. 이 기간 파독 광부, 간호사가 보내온 송금액은 1억7000만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피붙이는 고사하고,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현지인들이 기피한 광부와 간호사 일을 하던 젊은이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고국으로 돌아와 땅끝 남해에 마을을 이뤘다. 남해군에서 부지를 제공했고, 이들은 독일식 건물을 지어 2002년부터 독일마을을 꾸렸다. 현재 파독 광부와 간호사 30여 가구가 거주 중이다. 2014년엔 이들의 독일 삶을 알 수 있는 파독전시관이 개관했다.

전시관에선 독일마을에 처음으로 입주한 석숙자씨 등 주민들이 직접 전시내용과 당시의 생활을 안내해주고 있다. 석씨는 “독일에서 다른 것보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울기도 많이 울었고, 마늘 등 음식을 가려 먹을 정도로 눈치를 보며 살았다”며 “3년 계약으로 갔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하다 보니 30년을 독일에서 살다가 내 조국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에 독일마을에 정착하게 됐다”고 말했다.
남해 독일마을에 처음 입주한 석숙자씨가 파독전시관에서 당시 생활과 전시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파독전시관에 전시된 파독 광부의 당시 모습과 장비들.
파독전시관에 전시된 간호사복.
독일 전통모자를 쓰고 있는 파독 간호사 출신 독일마을 주민.
독일마을에서 파는 독일 맥주와 소시지.
전시관에 들어서면 ‘오늘도 무사히(Gluck Auf)’란 독일어 문구가 새겨진 갱도를 지난 후 당시 광부, 간호사들이 사용했던 자료를 전시한 공간으로 이동한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이들이 한창일 때 사진들이 함께 진열돼 있다. 전시관 한쪽 벽면엔 이들의 삶을 알 수 있는 영상 작품이 방영되고 있다. 전시관 관람 후엔 독일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면 차와 맥주 한 잔을 즐기는 것이 좋다.
프랑스, 일본, 핀란드, 이탈리아, 미국, 네덜란드 등 각국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주택과 정원이 조성돼 있는 원예 예술촌.
독일마을 옆엔 원예 예술촌이 있다. 서울과 경기도에 살던 원예전문가들이 찾아오면서 형성됐다. 2009년부터 정원과 집을 작품으로 가꾸며 살아가고 있다. 프랑스 베르사유궁전에서 볼 수 있는 정원을 가진 ‘프렌치가든’과 모래, 돌길, 바위, 석등, 분수가 꽃나무들과 어우러진 일본풍의 ‘화정’, 핀란드식 통나무집, 이탈리아풍 대리석 주택, 현대적인 미국식 전원주택, 풍차가 달린 네덜란드 주택 등 각국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주택과 정원이 조성돼 있다. 집안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정원은 자유롭게 드나들며 사진을 찍거나 돌아볼 수 있다.

남해=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