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는 개국 시기가 확실치 않다. 기원 전후로 추정할 뿐이다. 500년 넘게 연맹체제로 이어온 가야는 서기 562년 신라에 의해 멸했다. 백제가 멸망하기 불과 100년 전까지 한반도에 존재한 것이다. 낙동강 하류 일대에서 번성했던 가야는 경북 고령 지역 대가야, 상주 고령가야, 성주 성산가야, 경남 김해 금관가야, 함안 아라가야, 고성 소가야 등 크게 6가야로 구분된다.
가야 건국신화로는 두 가지가 전한다. 하나는 ‘가야산에 살던 산신 정견모주와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 이비가가 만나 두 아이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 둘째아들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고 한다. 다른 신화는 ‘하늘에서 6개의 커다란 알이 내려왔는데, 가장 먼저 깨어난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5개의 알에서 나온 동자들은 5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경북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대가야박물관 위로 높고 봉곳한 봉분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정리 안 된 공동묘지 분위기다. 다양한 크기의 700여기 고분들이 산 허리 곳곳에 퍼져있는 모양새다. 등산로가 가파르지 않아서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고분 사이를 가볍게 걸어다닐 수 있다. |
신화에서도 알 수 있듯 연맹체제의 가야를 대표한 곳이 김해의 금관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다. 금관가야가 번성했던 서기 400년까지를 전기 가야연맹으로, 그 이후 대가야가 번성했던 시기를 후기 가야연맹으로 구분한다. 금관가야는 서기 400년 무렵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뒤 쇠퇴하기 시작해 532년 신라에 항복한다. 낙동강을 활용해 일본 등과 교역한 금관가야는 고구려와 신라 연합군에 패한 후엔 낙동강 수로를 활용하지 못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금관가야에서 많은 주민이 고령 대가야로 이동한다. 금관가야의 교역과 철광 개발 지식이 대가야로 전수되고, 이는 대가야의 성장으로 이어진 것으로 학계에선 추정하고 있다. 대가야는 금관가야의 낙동강 수로가 막히자 경남 거창·함양·하동과 전북 남원·임실·장수, 전남 순천·광양까지 영토를 확장한다. 섬진강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대가야는 섬진강을 통해 일본, 중국까지 교역 루트를 확보한다. 백제와 신라 사이 지금의 영호남을 아우르는 영토를 가진 가야연맹의 맹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점차 영토를 확장하며 위세를 떨치던 대가야는 백제·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다 패한 뒤, 결국 562년(진흥왕) 신라 군대의 공격을 받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그렇게 역사에서 잊힌 존재와 같았던 가야는 일제강점기 때 주목을 받게 된다. 바로 일제가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가야지역을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기 위해 일제는 가야 고분들을 파헤쳤다. 그 당시 파헤쳐진 고분들이 있는 곳이 대가야의 중심지 경북 고령이다.
안개가 무덤을 타고 넘는다. 고령의 주산 봉우리 동남쪽 능선을 따라 분포돼 있는 무덤들은 아침이면 아래서부터 스멀스멀 피어 오르는 안개에 둘러싸인다. 정상이 해발 310m밖에 되지 않는 주산 중턱에 수백기의 무덤이 있다. 주위에 더 높은 산이 있지만, 유독 주산에만 무덤들이 모여 있다. 안개가 피어오를 때 무덤이 있는 중턱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고령 시내의 건물들이 안개에 가린다.
수천년 전 고령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듯싶다. 죽은 자들의 쉼터와 그리 멀지 않은 아래는 살아 있는 자들의 공간이다. 무덤이 있는 주산의 높이는 얼마 안 되지만 안개로 잠시나마 속계와 선계를 구분했을 듯싶다. 안개로 삶과 죽음의 공간이 잠시 구분되지만, 얼마 있으면 이 장벽은 사라진다. 삶과 죽음이 나뉘는 것은 안개처럼 순간이고, 결국 이들은 하나라고 가야인들은 본 듯하다.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을 것이란 가야인들의 생각은 무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바로 순장이다. 신라 등 삼국에서도 순장이 행해졌지만, 고령 지산동고분군만큼 뚜렷하게 그 모습이 남아있는 곳은 없다. 살아있는 이를 같이 무덤에 묻는 행위는 결국 죽은 후에도 권력과 힘이 유지될 것이라는 삶의 영속성을 이들이 믿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에는 대가야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이 주산 아래 있고, 그 위로 높고 봉곳한 봉분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정리 안 된 공동묘지 분위기가 정확할 듯싶다. 다양한 크기의 700여기 고분이 산 허리 곳곳에 퍼져있는 모양새다. 대가야박물관을 둘러본 후 무덤 내 모습, 고분군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다른 나라와 구분되는 것은 토기다. 신라, 백제와 달리 토기의 목이 길다. 대표적인 긴목항아리는 목이 부드럽게 좁아 들어 몸체 부분과 ‘S’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드러낸다.
가야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토기다. 신라, 백제와 달리 토기의 목이 길다. 대표적인 긴 목 항아리는 목이 부드럽게 좁아 들어 몸체 부분과 ‘S’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어 가야 문화의 우수성을 볼 수 있다. |
고령 대가야박물관에는 가야인들이 고분을 조성한 방법이 전시돼 있다. |
왕릉전시관에서는 재현한 고분 내부 모습을 볼 수 있다. 가장 많은 순장자가 발견된 44호 고분을 재현했다. 순장자 무덤에서는 부부로 추정되는 30대 초반 남성과 30대 후반 여성이 포개져 묻혀 있는 무덤, 30대 남성과 8세 어린이가 포개져 묻혀 있는 무덤 등이 발견됐다. |
지산동고분군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에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광복 후 학술 발굴조사가 시작된 것은 1977년부터다. 대부분의 대형 고분들이 대부분 도굴돼 그나마 훼손이 덜된 대형 고분을 조사했다. 그중 44, 45호 고분에서 대규모 순장묘가 발견됐다. 사후 세계를 믿었다는 것이다. 특히 44호분에서 발견된 순장자는 36명이나 됐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순장자가 발견된 무덤이다.
순장자 무덤에서는 부부로 추정되는 30대 초반 남성과 30대 후반 여성이 포개져 묻혀 있는 무덤, 30대 남성과 8세 어린이가 포개져 묻혀 있는 무덤 등이 발견됐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이해하기 힘든 행위지만,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고 보는 당시 기준으로는 당연한 매장 풍습이었을 것이다. 이들을 산 채로 묻은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조사결과 순장자들은 대부분 두개골이 깨진 상태로 발견됐다고 한다. 순장자들을 죽인 다음 무덤에 묻은 것이다.
지산동고분군 능선을 따라 오르면 가장 큰 무덤 5기가 줄지어 있다. 가장 위에 있어서 1∼5호 고분으로 불린다. 가장 권세가 센 왕이 묻혔을 것을 추정되지만, 일제 때 도굴돼 발굴조사를 하지 않았다. |
고령 우륵박물관 앞의 우륵 조형물. |
◆가야에서 시작된 전통 악기 가야금
대가야 왕 중 이름이 확인된 왕은 6명 정도에 불과하다. 시조 이진아시왕, 기본한기, 하지왕, 가실왕, 이뇌왕,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이 그들이다. 그나마 익숙한 왕은 가실왕이다. 바로 3대 악성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도록 지시한 왕이다.
대가야박물관에서 차로 10여분이면 도착하는 곳에 우륵박물관이 있다. 우륵은 490년경 대가야의 성열현에서 태어났다. 현재 어느 지역이 해당하는지 확실치가 않다. 우륵박물관이 고령에 있는 것은 우륵 탄생지라기보다 대가야에서 가야금이 탄생했기에 조성했다고 봐야한다.
우륵박물관의 가야금. |
가야에서 제작한 가야금은 신라, 백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제 금동대향로엔 악기를 연주하는 조각이 돼 있는데, 그 악기가 가야금으로 추정된다. |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만든다. 최소 4년 이상 건조한 오동나무 중 뒤틀리지 않은 나무를 사용한다. 경북 고령 우륵박물관 옆에는 가야금을 제조하기 위한 오동나무 건조장이 있다. |
고령 개실마을의 점필재 김종직 종택. |
◆점필재 김종직 후손이 이룬 개실마을
조용한 한옥마을 개실마을은 겨울에 더 고즈넉함을 더한다. 가족끼리 찾는다면 한옥마을에서 유과와 엿 등을 만드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개실마을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이자 문신으로 성리학을 계승한 점필재 김종직의 후손들이 이룬 마을이다.
개실마을 고택들 사이의 돌담길을 걸으면 예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
개실마을 고택 담장의 수세미. |
고령=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