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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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정치 불신에… 유럽에 켜지는 ‘우회전 깜빡이’

양당 체제 붕괴 틈새 비집고 우파 정당 ‘약진’ / 극우 AfD 여당 표 갉아먹고 의회 입성… 메르켈 총리 , 독일 연정구성 협상 난항 / 2차대전 이후 첫 소수정부 구성 위기… EU 개혁현안 산적 … 獨에 우려의 시선 / 착실히 기반 다진 우파정당 힘찬 도약… 극단 민족주의 정치인 주류 편입 계기 / 2018년 헝가리·이탈리아 총선도 관심…여론조사서 극우 성향 정당 입지 확대
유럽 정치권 촉각이 일제히 독일로 쏠려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여러 달 공을 들인 연립정부 구성 협상이 진흙탕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면서 유럽 전체가 자칫 도미노 위기에 처할 조짐이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협상에도 차질이 빚어지고 유로존 개혁과 유럽연합(EU) 개편을 추진해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의지도 꺾일 수 있다. 총선에서 다수당이 과반 의석을 달성하지 못해도 다른 정당과 공동 정부를 구성해 국정을 운영하는 연정의 교과서 격이던 독일 정치가 삐걱거리는 것은 유럽에서 불고 있는 ‘우파 정당 대약진’ 바람이 중요 원인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존재감 자체가 없었던 극우 정당들도 각국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확산하고 양당 체제가 빠르게 붕괴하는 틈새를 비집고 당당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선거 후 연정이 구성되지 않아 정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원인의 한가운데에는 유럽 곳곳에서 켜지고 있는 ‘우회전 깜빡이’가 있는 것이다.

독일은 지난 9월 총선에서 간신히 1당을 차지한 메르켈 총리의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이 연정 구성에 실패해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소수 정부를 구성하거나 총선을 다시 실시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앞서 3월에 총선을 치른 네덜란드는 연정을 구성하는 데 7개월이나 걸렸다. 스페인은 2015년 12월 총선 이후 1당인 국민당이 연정 구성에 실패한 뒤 6개월 지나 재선거를 치렀는데도 여의치 않자 지난해 10월 소수 정권이 출범할 수밖에 없었다.

◆극우정당이 갉아먹은 득표율과 독일 연정 구성 난항

최근 메르켈 총리와 마르틴 슐츠 사회민주당(SPD) 대표는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함께 만나 메르켈 총리가 소속된 CDU·CSU 연합과 SPD의 연정 재구성이 가능할지 의견을 교환했다. 어떤 의견을 나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이 전해지지 않았다.
독일 총선에서 제3당으로 부상한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공동 총리 후보였던 알렉산더 가울란트(왼쪽)와 알리체 바이델이 베를린 당사에서 손을 맞잡고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베를린=AP연합뉴스

9월 총선에서 1당 자리를 유지한 CDU·CSU는 자유민주당(FDP), 녹색당과 연정 협상을 진행하다가 결렬되자 SPD에 손을 내밀었다. SPD는 이전 정부에서 CDU·CSU와 대연정을 구성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1당을 노리다가 실패하자 CDU·CSU와의 연정 재구성을 거부했다. 현재는 메르켈 총리가 선거 이후 두 달 넘게 연정을 출범시키지 못하면서 독일 정치가 혼란에 빠지자 결정을 재고 중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슐츠 대표는 슈타인마이어 대통령과 회동한 뒤 “연정 참여 여부를 신중히 검토해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고 말했고, 메르켈 총리는 “SPD와 협상 성공을 위해 진지하고 정직한 논의를 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양측이 연정 협상을 시작하기로 한다면 그에 앞서 조율할 사안이 쌓여 있다. CDU·CSU 내에서는 SPD와 협력하면서 당의 보수 색채가 흐려졌다는 지적이, SPD 안에서는 진보 정책을 보다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CDU·CSU와 SPD의 협상마저 결렬되면 메르켈 총리는 CDU·CSU만의 소수 정부를 출범시킬 가능성이 크다. 2차 대전 이후 독일 역사상 의회 과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수 정부가 탄생한 전례는 없다.

메르켈 총리의 집권 연합은 9월 총선에서 1949년 이래 최저 득표율(33%)을 기록했다. 낮은 득표율은 연정 구성의 가장 큰 약점이 되고 있다. 
대신 앞장서서 메르켈 총리를 비판해 온 극우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집권당의 표를 갉아먹으면서 득표율 3위(12.6%)로 연방의회에 처음 입성했다. 독일 총선에서 극우 정당이 72년 만에 의회에 입성한 것은 전 유럽이 놀란 ‘사건’이었다. 2013년 창당한 AfD는 유럽 대륙을 강타한 난민 대량 유입, 급진 이슬람 테러리즘 사태를 틈타 세력을 키워나갔다. 독일이 우여곡절 끝에 새 정부를 출범시킨다 해도 예전과 같은 정치적 안정을 기대할 수 없다. 나치 독재를 겪은 뒤 극우 세력으로부터 면역이 됐다는 독일 정치 지형은 AfD의 연방의회 진출을 계기로 이미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독일에 대한 유럽의 시선에는 걱정이 가득 묻어 있다. 독일 정치 혼란은 브렉시트, 유로존 개혁 등 EU의 중대한 현안이 산적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 메르켈 총리가 흔들리면 이들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동력이 떨어진다.

◆극단적인 민족주의까지… 우파 바람에 들썩이는 유럽

독일의 정치 혼란이란 ‘강진’으로 촉발된 유럽 전체의 ‘여진’에는 각국에서 부는 우파 정당 바람이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우파는 최근의 경제·정치 위기 때문에 반짝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 아니고, 이들은 유럽 대중의 정서를 정확하게 반영하며 착실히 지지 기반을 다져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 유럽 선거에서 우파 정당은 눈부신 활약상을 보이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듯하다. 소수 엘리트 중심의 기성 정당에 대한 반감의 결과가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포퓰리즘 성향의 정치인들로 하여금 주류에 편입할 수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반난민 반이슬람 정책을 내세운 우파 정당들이 과반 득표에 성공했고, 체코 총선에서도 우파 긍정당(ANO)이 승리했으며 이탈리아 극우정당 북부동맹과 네덜란드 극우정당 자유당이 약진한 데 이어 내년 상반기 총선을 치르는 헝가리와 이탈리아에서도 극우 정당 입지가 급속히 넓어지고 있다.
지난 10월 총선이 치러진 오스트리아에서는 승리한 우파 국민당과 극우 자유당이 연립정부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극우 ‘학생동맹’ 출신들까지 빠르게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국민당은 총선에서 전체 183석 중 62석을 차지해 11년 만에 1당이 됐고 자유당은 51석을 얻으며 사회민주당에 불과 1석 차이로 3당이 됐다. 국민당을 이끄는 31살의 제바스티안 쿠르츠 당 대표는 연립정부 파트너였던 사민당 대신 자유당과 먼저 연정 협상에 나섰다.

오스트리아 총선 결과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당선된 자유당 의원 중 20명이 대학생 때 학생동맹에 가입했다는 점이다. 오스트리아 학생동맹은 민족주의 성향을 앞세우며 범게르만주의와 나치를 지지하는 단체로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 총선 결과는 유럽 각국의 극우 정당들에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체코 총선에서는 반난민 포퓰리즘 정당 ANO가 전체 의석 200석 중 78석을 차지해 1당에 올랐다. 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은 경제, 안보,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난민 문제를 최대 논쟁거리로 이끌어 갈 태세다. 

이탈리아 극우정당 북부동맹을 이끄는 마테오 살비니의 페이스북에는 이슬람에 반대하는 해시태그(Stopislam)가 달려 있다. 네덜란드의 헤이르트 빌더르스 자유당(PVV) 대표도 공공연히 “이슬람은 유럽이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고 있고, 헝가리의 페테르 시야르토 외무장관은 난민 정책을 놓고 EU와 설전을 벌이고 있다.

내년 상반기에는 헝가리와 이탈리아가 총선을 치른다. 헝가리에서는 극우 성향의 여당 피데스가 난민 문제로 EU를 공격하면서 각종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40%대의 고공행진을 하며 표심을 자극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도 난민에 대한 반감을 앞세운 극우정당들이 입지를 확대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는 지난 6월 제노바, 라퀼라 등에서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우파 연합의 구심점 역할을 한 데 이어 내년 총선의 전초전으로 주목받은 11월 시칠리아 주지사 선거에서까지 승리를 일궈내 건재함을 과시하며 주가가 급등했다.

이상혁 선임기자 nex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