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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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귀차니즘’이 ‘만렙’(가득 찰 ‘만(滿)’과 영어 ‘레벨’의 합성어로, 최대 레벨이라는 뜻)인 나는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에 크게 공감한다.

여행에서 돈을 써봤자 남는 건 휴대전화 안의 사진 몇 장뿐이니 차라리 그 돈으로 옷이나 신발 등을 사는 게 낫다는 게 평소의 생각. 결혼 전에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여행을 즐기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런 내가 “연차 휴가를 소진하라”는 회사의 방침에 연차를 낸 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덜컥 끊었다. 평일에 갑작스러운 휴가에 동반자를 구하지 못해 본의 아니게 하게 된 ‘혼행’(혼자 하는 여행)이었지만 그간의 여행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단번에 바꿀 만큼 좋았다.

집과 회사를 오가며 지겹도록 반복하는 일상에서 벗어나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좋아하는 노래를 크게 틀고 해변도로를 드라이브하며 잡다한 생각에 빠지는 것도 좋았다. 전망 좋은 카페에선 바다를 바라보며 멍을 때리기도.

먹거리는, 혼자 여행 떠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걱정하고 나 또한 그랬지만 기우였다. 1인 가구가 2015년 기준으로 25.7%에 달하고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 제주의 대표적인 음식인 돔베고기, 갈치조림을 1인분으로 파는 식당이 많았다.

“한라봉에이드 한잔이요”, “1인분이요”, “얼마예요” 등의 필요한 말만 반나절 넘게 해 대화 상대가 그리울 즈음 게스트하우스에서 새 친구들을 만났다.

내가 묵은 게스트하우스는 밤마다 숙박객 전체가 모여 치맥 파티를 열었다. 20명쯤 모였는데, 절반 이상이 혼자 여행 온 사람들이었다. 통성명을 하고 여행지와 식당에 대한 정보도 나누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대학 새내기 시절 MT를 온 듯한 느낌이었다. 같은 테이블 사람들과 외부 술집에 나가 2차를 하고 노래방까지 다녀왔다. 이쯤되면 이성적인 만남은 없었느냐고 궁금해할 독자가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남녀 구분 없이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튿날엔 약간의 우정까지 느끼게 된 게스트하우스 친구들과 함께 다녔다. 가파른 새별오름을 힘겹게 오른 뒤 내려다보는 제주도는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산굼부리의 거대한 분화구를 내려다보면서 ‘왜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지 않고 아등바등 살았을까’ 싶은 후회까지 했다. 고깃집에서 6명이 흑돼지 5근을 먹어치웠을 때 ‘역시 고기는 여럿이 구워 먹어야 제맛’이라는 생각에 살짝 감동이 밀려들기도 했다. 

남정훈 사회부 기자
혼자 그리고 같이한 2박3일간의 제주도 여행은 나를 많이 바꿀 것 같다. 시행착오도 없지 않았지만 다음 여행은 더 잘할 자신도 생겼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제주도엔 성산 일출봉, 우도, 비자림, 정방폭포 등이 있다. 전국으로 눈을 돌리면 널렸다고 할 만하다. 매달은 힘들어도 2~3개월에 한 번씩은 혼자 떠나와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시간을 줘야겠다. 다음 여행은 연차가 빵빵하게 충전될 새해의 1월이 될 것 같다. 이번 제주 여행처럼 혼자라도 좋을 것이고, 이번에 같이 가지 못했던 친구들과 함께여도 좋을 것이다.

고은 시인의 ‘낯선 곳’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남정훈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