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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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한 사람만 제 역할 했더라면

“다음 주에 소방 특별조사가 있으니 전 직원은 소방로와 비상구 등에 쌓아둔 상품과 집기류 일체를 말끔하게 치우기 바람”

늘 이런 식이었다. 1년에 한두 차례 인근 소방서에서 점검을 나오기 전 부랴부랴 지시가 떨어졌다. 소방점검쯤은 그저 귀찮은 연례행사로 치부됐다. 대학을 휴학한 뒤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대형마트 보안팀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소방관들이 올 무렵 창고를 겸한 소방 대피로에선 ‘모세의 기적’이 일어났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대피로를 가득 메웠던 상자들은 거짓말처럼 소방로 확보선 바깥에 차곡차곡 정리됐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소방서에서 점검 나온 소방관들은 잠시 둘러보고는 점장의 안내로 사무실에 가 차를 마셨다. 점검은 당연히 ‘무사통과’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무렵 대피로는 다시 ‘원상복구’됐다.

이 마트의 소방안전 실태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층층이 마련된 창고 내 대피로 중 제대로 정리된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한쪽 비상구가 냉장고로 막혀 있어 반대 방향 비상구로 가면 이번에는 각종 매대 등 집기류가 가로막았다. 모두가 퇴근해 썰렁한 한겨울 밤엔 홀로 남겨진 난방기가 창고 안에서 연신 더운 바람을 뱉어내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보안근무자 신분으로 순찰하며 해당 부서 직원들에게 아무리 주의를 주고 사진을 찍어 상급자에게 보고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용역업체의 파견 사무실 격인 대형마트 내 보안팀은 ‘고객’인 마트 측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어 몸을 사렸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는 없다’는 말처럼 조용히 넘어가는 게 급선무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없겠다’는 좌절감에 휩싸여 대학으로 돌아갔다.

배민영 사회부 기자
충북 제천 화재참사를 바라보며 5년여 전과 비교해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이 허탈하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부모, 자녀, 친구였을 희생자 29명이 무사히 구조됐더라면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부푼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했을 것이다. 가족의 건강을 기원하며 다시 한 번 신발 끈을 조여 매고 열심히 살아갔을 이웃들이었다. 그 모든 것이 큰불이 나면서 무산됐다.

단 한 사람만 제 역할을 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였다. ‘한 사람 건너 다 아는’ 이웃의 안전을 위해 소방당국이 평소 예방활동을 철저히 했더라면 민간 소방업체가 원칙에 따라 점검을 했더라면 29명은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진상조사를 하면 할수록 책임자들 중 단 한 사람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평상시 화재 예방활동은 미흡하기 그지없었고, 재난이 벌어진 뒤 대응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번 참사를 계기로 잠깐 시끄러웠다가 조금만 지나면 조용해지는, 그리고 또다시 참사가 반복되는 ‘원칙 없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소방공무원의 특별조사 시 1주일 전 조사 대상에 통보하도록 규정한 소방시설법 개정은 물론 민간 소방업체의 점검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관계당국의 감시체계 구축까지 신속히 추진해 이런 인재가 다신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배민영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