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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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지금은 살만한가”… 茶山이 묻는다

‘목민심서’ 발간 200년 전남 강진, 다산의 숨결 찾아
바닷가 갈대밭 마을에 사는 한 백성이 아들을 낳았다. 이 아이는 태어난 지 사흘 만에 군적에 이름이 올려졌다. 16세가 돼야 군역의 의무가 부여됨에도 군적에 편입돼 젖먹이 명목의 군포(軍布)를 부담해야 했다. 하지만 군포를 내지 못했고, 집에 있는 소를 관청에서 가져갔다. 결국 이 백성은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러한 곤액을 받는다’며 칼로 자신의 성기를 잘라버렸다. 그의 아내는 관청에 가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문지기에 막힌 채 하소연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얘기를 전해 들은 그는 조선 후기 부패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참담한 심경을 7언 20구의 ‘애절양(哀絶陽)’이란 한시로 읊었다. ‘절양(絶陽)’은 남성의 성기를 자른다는 의미다. 당시 군적에 오른 사람은 병역 대신 군포를 내야 했다. 관리들은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기 위해 죽은 사람과 갓난아이의 이름까지 군적에 올려 세금을 거둬들였다. 결국 이 같은 군포를 감당할 수 없었던 백성이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성기를 자르는 비극적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민초들이 겪는 이 같은 비참한 일은 중앙에서 먼 지방일수록 더 빈번하게 벌어졌다. 만약 그가 한양에만 있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현실을 인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싶다.

정약용이 18년간의 유배 생활중 가장 오래 머문 다산초당. 그는 강진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집필에 몰두해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의 책을 남겼다.
다산 정약용은 한양에서 멀디먼 전남 강진까지 내려오게 된다. 그의 나이는 한창 기개를 펼칠 마흔이었다. 1801년부터 시작된 유배생활은 1818년까지 이어진다. 고통스럽고 참담했을 18년의 유배 기간에 그는 학문에 정진한다. 단순히 책만 파고들어 경전만 해석하지 않았다. 현실에서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직접 보고 느꼈다. 정약용은 강진에서 조선 후기 민초들의 처참한 현실을 인식하고 개혁의 절박함을 더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유배 기간 중 그가 저술한 대표적인 책이 ‘목민심서’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인 1818년 ‘목민심서’를 완성한다.

그는 ‘목민심서’에서 “가난한 집에서는 아기 낳기가 무섭게 반드시 병적에 올려져, 이 땅의 부모된 자로 하여금 천지의 생생(生生)하는 이치를 원망하게 하여 집집마다 탄식하고 울부짖게 하니, 나라의 무법함이 어찌 여기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심한 경우에는 배가 불룩한 것만 보고도 이름을 지으며 여자를 남자로 바꾸기도 한다”며 관리들의 탐욕을 꾸짖은 뒤 관리들이 어떻게 해야 공평하고 청렴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했다. 200년이 지난 지금도 공직자의 윤리를 얘기할 때 지침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책이 ‘목민심서’다. 다른 때보다 올해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약용과 ‘목민심서’가 많이 거론될 것이다. 200년 전 정약용이 제자들과 목민심서를 저술했을 때와 지금 강진은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군자의 학(學)은 수신(修身)이 그 반이요, 나머지 반은 목민(牧民)’이라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그가 머무르며 품었던 풍광을 함께하기엔 부족함이 없을 듯싶다. 

전남 강진 백운동 별서정원은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가 출세의 뜻을 버리고 은둔해 살고자 살림집과 떨어진 곳에 지은 별채로 호남 3대 정원 중 한 곳으로 꼽힌다.
귀양을 떠난 정약용이 낯선 땅 강진에 첫발을 디딘 때가 음력 11월로 이맘때였다. 이맘때 남녘의 들바람은 그리 차지 않다. 매서운 겨울바람보다는 따스한 겨울 햇볕이 곳곳에 퍼져 있다. 남녘이기에 가능하다. 200여년 전 정약용이 강진에 당도했을 때 날씨도 그리 날이 차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의 마음은 엄동설한의 추위보다 더 얼어붙었을 것이다. 같이 유배를 떠난 그의 형 정약전과 전남 나주에서 마지막 만남이 될지도 모르는 밤을 보낸 뒤 그는 강진으로, 그의 형은 흑산도로 각자 귀양길을 떠났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생을 마쳐 형제의 만남은 실제 마지막이 됐다.

정약용이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무른 곳은 주막의 주모가 내어준 골방 하나였다. 서학을 신봉한 죄인으로 귀양 온 정약용을 그 누구도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골방에 거처를 잡은 그는 방의 당호를 ‘사의재’(四宜齋)로 지었다. 생각(思), 용모(貌), 언어(言), 행동(動) 네 가지를 반듯하게 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유배생활 처음 4년 동안 이곳에서 교육과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현재 강진군청에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사의재에 머물며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받아들여 글을 가르쳤다.

사의재에서 머물다가 유배 장소를 옮겨다니던 그는 1808년 ‘다산초당’에 자리 잡는다. 다산초당은 해남 윤씨 가문에서 내어준 곳이다. 정약용의 모친이 해남 윤씨였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산초당 주차장에서 초당까지 걸어가는 데는 10여분이면 충분하다. 대나무와 두충나무가 어우러진 숲길을 지나면 ‘뿌리의 길’을 만난다. 소나무 뿌리들이 나무 계단처럼 지상으로 뻗어 있다. 정약용도 200년 전 이 길을 걸어 올랐을 것이다. 많은 이들의 발길에 차이고 밟혀 뿌리계단은 반질반질해졌다. 정약용이 뿌리계단을 보며 마치 밟히고 밟혀 상처 입고 곪을 대로 곪은 민초의 삶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초당에는 1000여권이나 되는 책이 정약용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부터 유배를 마친 1818년까지 그는 제자들과 집필에 몰두했고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500여권의 책을 남겼다. 원래의 초당은 무너져 1958년에 중건된 것이다.

다산초당의 인근의 누각 천일각.
이곳에서 정약용이 거처했던 동암을 지나면 누각 천일각이 나온다. 강진만이 내려다보인다. 정약용이 고향에 있는 가족과 흑산도에서 유배 중인 형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찾곤 했던 곳으로, 누각은 1975년 세웠다.

산길은 백련사로 이어진다. 정약용이 유배 시절 마음을 터놓고 학문을 논할 수 있었던 혜장 선사가 주지로 있던 곳이다. 서른셋에 백련사 주지가 될 정도로 뛰어난 학승이었던 그는 유학에도 식견이 높았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엔 수령 400년이 넘는 동백나무가 자리를 잡고 있다. 3월이면 이 길은 붉게 물드는데, 성격 급한 동백 한 두송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백련사는 다산초당에서 1㎞ 정도 떨어져 있는데 정약용과 혜장은 서로를 만나기 위해 수시로 이 길을 오갔을 테다. 수령 400년이 넘는 동백나무가 길 주변에 빼곡히 자리를 잡고 있어 3월이면 이 길은 붉게 물들 것이다. 지금도 성격 급한 동백들은 한두 송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정약용은 혜장 선사를 만나면서 차에 대해 깊이 알게 된다. 특히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는 만덕산에는 야생차밭이 있어 정약용은 호를 다산(茶山)으로 짓는다.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선사도 이때 다산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다산이 푹 빠졌던 차밭의 향연을 보려면 백운동 별서정원으로 향하면 된다. 조선 중기 처사 이담로가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다시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올라간다는 백운동에 조성한 별서정원이다. 출세의 뜻을 버리고 은둔해 살고자 살림집과 떨어진 곳에 지은 별채를 뜻하는 별서정원으로, 은둔하기에 이만한 장소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외져 있다. 정원을 가려면 백운계곡과 어우러진 동백나무·비자나무 등 상록수림 등을 지나쳐야 한다. 지금이야 길이 정비돼 주차장에서 걸어 5분도 채 걸리지 않겠지만, 당시엔 나무가 우거진 이곳에 정원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원엔 아홉 굽이의 인공수로 ‘유상곡수’가 조성돼 있다. 뒤로는 웅장하고 화려한 월출산이 자리하고, 앞으로는 계곡이 흐르는 경치를 보며 경주의 포석정처럼 이 수로에 술잔을 띄워 마셨다고 하니 그 정취를 비교할 곳이 있을지 모르겠다. 담양 소쇄원, 해남 보길도 세연정과 더불어 호남의 3대 정원으로 불리는 것이 헛말이 아닐 듯하다. 다산도 초의선사 등과 월출산을 등반한 뒤 정원에 들러 하룻밤을 묶었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풍광을 초의선사에게 그리게 했고, 유상곡수 등 12 경치를 시문으로 남겼다. 관리가 안 돼 황폐해져 있던 백운동 정원은 초의선사의 그림과 다산의 시문을 바탕으로 옛모습을 재현했다.


다산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서 혜장 선사를 만나 차에 푹 빠져든다. 월출산 남쪽기슭 성전면 월남리에 드넓은 차발이 펼쳐져 있다. 차나무 사이를 걸어도 좋고, 차밭 사이 길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양옆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즐겨도 좋다.
이 정원을 지나면 월출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차밭 강진다원이 펼쳐진다. 좋은 차는 명산에서 생산된다는 말이 있듯이 이곳은 해방 직전까지 일본 차에 맞서 만든 국내 최초의 녹차제품 ‘백운옥판차’를 생산하던 차산지이기도 하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차밭을 소유해 관리하고 있다. 전남 보성의 다원만큼 유명하지 않아 찾는 이가 적어 한적하다. 차나무 사이를 걸어도 좋고, 차밭 사잇길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양옆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즐겨도 좋다.

12가지 한약재를 한 시간 이상 푹 끓여 담백하게 우려낸 국물에 문어와 전복, 닭을 넣고 끓인 회춘탕.
남도에서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강진은 산과 들, 바다가 어우러져 신선하고 다양한 음식 재료들이 많다. 풍부한 재료들로 만든 보기만 해도 배가 절로 부른 강진한정식이 대표적이다. 널따란 교자상은 간장게장, 전복찜, 왕새우구이, 한우떡갈비, 꼬막찜, 삼합 등 수를 헤아리기조차 벅찰 만큼 많은 음식으로 꽉 들어찬다. 상다리가 부러지지 않는 게 이상하다.

이처럼 다양한 음식의 한정식이 발달한 것은 유배지였기에 가능했다. 정약용 외에도 많은 조선 사대부와 왕족들이 유배를 왔다. 재력이 있는 이들은 수라간 궁녀 등을 데리고 왔고, 궁중음식과 사대부 집안의 요리법이 전해졌다. 현재의 강진한정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다강한정식, 예향 등 다양한 한정식집이 있는데, 보통 4인 한 상에 10만원부터 시작한다. 한정식 외에 회춘탕도 있다. 12가지 한약재를 한 시간 이상 푹 끓여 담백하게 우려낸 국물에 문어와 전복, 닭을 넣고 끓인 음식이다. 이름처럼 다시 젊어진다는 의미인데, 최근 개발된 향토음식 중 하나다.

강진=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