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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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방과후 영어금지’ 역풍 맞은 이유

그건 그러니까 ‘마트 시식코너’ 같은 것이었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맛이 궁금해서, 입이 심심해서 한두점 집어먹었을 뿐이다. 요즘 말 많고 탈 많은 초등학교 1, 2학년 방과후 영어 말이다.

많은 부모가 ‘우리 아이도 네이티브 스피커(원어민)처럼 말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그래서 방과후 영어를 시키지는 않는다. 교육부가 ‘조기교육의 폐해’ 운운하니 누가 들으면 방과후 영어가 대단한 몰입교육이라도 하는 줄 알겠지만, 초등학교든 유치원이든 어린이집이든 방과후 혹은 특별활동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수업은 영어에 살짝 발만 담가보자는 게 보통이다.

윤지로 사회부 기자
‘제대로 영어 말문 트이게 하자’는 열망이 모이는 곳은 학교가 아니라는 걸 부모도 알고 교육부도 알고 있다. 그런데 엉뚱하게 초등학교 1, 2학년 방과후 영어를 금지하겠다니 황당할 수밖에.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에 학원이나 학습지 대신 유치원 방과후 영어만 시키다가 올해 초등학교 학부모가 되는 기자에게는 정부의 방침이 이렇게 들렸다. ‘밥 때가 아닌데 밥을 먹으면 비만이 우려되므로 시식코너를 금지한다.’

고열량 패스트푸드는 놔두고 말이다.

그럼 외국어 교육 시작의 적기는 정말 초등학교 3학년일까.

유럽연합(EU)은 4∼5년에 한 번씩 ‘학교에서의 언어교육’이라는 자료집을 발간한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36개 조사대상국(한 나라에서 언어권이 다르면 별개로 계산) 가운데 우리나라 초등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7세 이전에 외국어를 가르치는 나라는 16개국(44%)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발간된 자료를 보면 우리보다 더 어린 나이에 외국어를 가르치는 나라가 40개국 중 21개국(53%)으로 늘었다. 여기서 외국어는 80%가 영어이고, 기타 20%에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가 포함된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초등학교 3학년이 적기’라는 말을 교리처럼 믿고 따라주길 바라는 모양새다. 과열된 영어교육을 정말로 바로잡고 싶었다면 초3부터 배우는 학교 수업만으로도 영어 소통에 어려움이 없다는 확신을 먼저 줬어야 한다. 하지만 교육부가 지난 16일 유치원·어린이집 영어 금지를 유예하며 한다는 말이 학교 영어교육 내실화 방안을 ‘연내에’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방과후 영어 금지가 사교육을 부채질할 것이란 비판이 한창이던 지난 8일 초등학교 예비소집이 있었다. 그 ‘부채질’에 휩쓸려 한 손에 학교에서 나눠 준 서류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론 아이의 손을 잡고 영어학원을 찾았다.

‘파닉스(발음법)만 조금 더 하면 금방 진도 나가겠다.’, ‘따로 안 배웠는데 이 정도면 재능이 있다.’, ‘이런 아이들은 초기에 틀을 잡아주면 고학년 되면 스스로 잘한다.’

달달한 말이 이어졌다. 옷가게 직원의 ‘손님, 잘 어울리세요’ 같은, 흔한 영업용 멘트라는 걸 알면서도 이제야 내실화 방안을 찾겠다는 정부보다는 낫겠다 싶었다.

학원을 나서는 기자의 손에는 학교 입학서류 말고도 학원에서 등록 기념이라며 준 일주일 무료 수강쿠폰과 학원가방이 들려 있었다.

윤지로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