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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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스토리] 사라지는 마을 흩어지는 동물들…재개발사업 '공존'을 부탁해

주민들 떠난 뒤 캣맘이 먹이 주고 돌봐 / 시민 1000여명 후원금 2500만원 모아 / 보호소 이주·입양 등 대책 방안 검토 / 북한산 들개 등도 재개발로 갈 곳 잃어 / “민관 협의체 구성, 이주안 선례 만들어 동물 복지 향상 노력해야 사회도 성숙”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이 동요는 어린이들이 흙장난 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모래흙으로 쌓은 흙뭉치를 두꺼비가 멋들어진 새집으로 바꿔줄 거라는 바람이 가사에 담겨있다. 만약 두꺼비가 진짜 나타나 새집을 지어준다면 모래흙으로 쌓은 헌 집은 어떻게 될까. 흙뭉치와 흙뭉치 안에 함께 살던 곤충이나 지렁이는 어디로 갈까.

‘둔촌냥이’와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캣맘’들은 이 물음에 답을 찾으려고 남았다. 헌 집인 아파트가 사라지면 길고양이들은 어디로 가야만 할까. 지난해 7월 사람들이 아파트를 떠나기 시작하자 캣맘들과 둔촌냥이는 길고양이와 ‘공존’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전례 없는 대규모 길고양이 이주… 개체수 확인부터 막막

둔촌냥이는 둔촌주공아파트 주민인 이인규(36·여)씨와 옆 동네 주민 김포도(37·〃·가명)씨, 정미진(36·〃)씨가 둔촌주공아파트 길고양이의 보호와 안전한 이주를 위해 지난해 6월 만든 모임이다.

‘안녕, 둔촌주공아파트’라는 책을 펴낸 이씨는 둔촌주공아파트의 생태계에 관해 관심을 갖다가 길고양이 보호를 함께하게 됐다. 둔촌2동 주민인 김씨는 길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다가 둔촌 1동 둔촌주공아파트 길고양이 보호자를 자처하게 됐다. 이들과 함께하는 정씨는 “인간의 욕심으로 고양이를 키우고 재개발을 원했지만 결국 더 큰 욕심에 따라 고양이들만 남거나 버려졌다”며 “인간의 욕심 때문에 버려진 동물들에 대한 마음의 짐 때문에 모임에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전국에 5000곳이 넘는 곳에서 재개발과 재건축이 이뤄지지만 이들이 참고할 수 있는 선례는 많지 않았다. 강동구 고덕주공2단지와 강남구 개포주공3단지는 철거 공사 이후의 길고양이 이주 사례라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었다.

가장 답답했던 현실은 축구장(7140㎡) 87개 넓이의 둔촌주공아파트에 고양이가 얼마나 살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와 강동구 동물복지팀의 도움을 받은 김씨는 카메라를 들고 아파트를 누볐다. 개별적으로 먹이를 주는 캣맘들을 만나 길고양이들을 소개받고 하나하나 사진을 찍었다. 5개월 동안 길고양이를 찾아 사진을 찍고 위치를 확인한 끝에 김씨와 캣맘들은 길고양이 183마리의 위치를 ‘고양이 지도’로 표현할 수 있었다. 김씨는 “사진에 담지 못한 길고양이까지 고려하면 200마리 정도 될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그는 웬만한 길고양이의 이름은 물론 생김새와 특징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개체수 확인과 더불어 중성화사업(TNR)도 차근차근 이뤄졌다. TNR은 길고양이 개체수 증가를 막고 활동반경을 줄이는 효과가 있어 이주 전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김씨는 “캣맘들과 강동구 덕분에 80% 이상이 TNR이 돼 이주 방법만 결정되면 언제든지 길고양이 특성에 맞춰서 이주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씨의 작업은 카카오스토리펀딩에 ‘이사 가는 둔촌고양이’ 프로젝트로도 소개됐다. 이씨는 둔촌냥이 모임의 활동을 알리고 길고양이 보호와 이주에 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씨는 “기대했던 것보다 반응이 좋아 목표했던 모금액을 벌써 다 모았다”며 “이주 방법을 마련하는 대로 계획한 후원금을 길고양이들을 위해 쓸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동구에서 유기동물 발생을 막기 위해 만든 현수막 ‘엄마! 나도 데리고 이사 가요’가 지난 17일 둔촌주공아파트에 걸려 있다.
이창훈 기자

◆재건축·재개발 이후에 남은 동물… 바람직한 이주방안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는 3월부터 철거 공사가 시작된다. 철거가 시작되면 둔촌주공아파트 외곽으로는 높은 펜스가 설치돼 사람과 동물의 출입이 차단된다. 강남구 개포주공 3단지 재건축의 경우 철거 공사가 개시된 뒤 길고양이 이주를 시작해 구청, 시공사·조합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캣맘들과 둔촌냥이, 동물보호단체 모두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기 전 길고양이 옮겨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거리·원거리·입양 등의 이주 방법을 놓고 둔촌주공아파트에 가장 적합한 방안을 모색 중이다.

근거리 이주 방안에 대해 이씨는 “강동구에서 TNR 사업을 꾸준히 실시하고 길고양이 급식소를 운영해 인근 동네에 길고양이를 수용할 여유가 있다”며 “사람을 잘 따르는 길고양이는 입양을 추진하고 개별 특성에 따라 이주 방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병길 한국동물표준복지협회 사무총장은 “인근에 왕복 10차선 도로를 끼고 있고 한꺼번에 많은 길고양이가 옆 동네로 옮겨가면 주민들과 마찰도 빚을 수 있다”며 “폐교나 보호소 등을 활용한 원거리 이주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서정대 조윤주 교수(애완동물과)는 “이미 사람 손을 탄 길고양이는 안정적으로 먹이를 공급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고양이에게 우호적인 주민들이 있는 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며 “길고양이 이주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인간과 동물이 공존할 수 있는 재건축·재개발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민관이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