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S 스토리] ‘둔촌냥이’를 부탁해!

최대 규모 재건축 서울 ‘둔촌주공’ 3월 철거… 길고양이 200마리 막막 / 주민·보호단체 ‘이주 대작전’ 모색
지난 17일 찾은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주민이 떠난 빈 아파트에는 적막감만이 가득했다. 곳곳에 버려진 쓰레기, 깨진 보도블록과 유리창, 퇴색한 채 갈라진 외벽이 곧 재건축을 앞둔 ‘동네’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바스락바스락∼’ 3단지의 텅빈 놀이터를 지나다 적막함을 깨는 낙엽 밟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새까만 길고양이 한 마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반달이에요.” 둔촌주공아파트 길고양이 보호와 이주를 위해 결성된 ‘둔촌냥이’ 모임의 김포도(36·여·가명)씨가 가방에서 꺼낸 사료를 길고양이를 향해 흔들었다. 반달이는 주변의 낯선 사람 때문에 살짝 거리를 두다가 김씨가 바닥에 앉자 곧장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반달이를 쓰다듬던 김씨는 “살도 포동 포동하고 털에도 윤기가 흐르는 걸 보면 상당히 건강해 보인다”며 “‘개냥이’(개+고양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고 자랑했다. 

김씨와 함께 둘러본 둔촌주공아파트(62만㎡)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재건축 단지라는 이름에 걸맞게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지난해 7월부터 시작된 공식 이주기간이 19일 끝나면서 1∼4단지 5930가구 중 98.6%(5846가구)가 아파트를 떠났다.

사람이 떠난 아파트의 풍부한 녹지와 넓은 지하공간은 최상의 길고양이 서식 환경으로 탈바꿈했다. 아파트 숲 속 오솔길에서는 길고양이가 비둘기를 잡아 먹은 흔적도 발견됐다.

김씨는 “햇볕 좋은 날에는 잔디밭과 공터에서 단체로 일광욕을 즐기는 고양이들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둔촌냥이와 한국동물표준복지협회 등에 따르면 현재 이 아파트에 사는 길고양이는 200여 마리로 추산된다. 20여명의 캣맘이 요일별로 52곳의 고양이 급식소에서 먹이를 주면서 길고양이들을 관리하고 있다. 

준공 39년째를 맞는 아파트는 오는 3월 본격적인 철거 공사에 들어간다. 둔촌냥이와 캣맘들, 동물보호단체 등은 근거리 이주와 원거리 이주, 입양 등의 길고양이 이주 방안을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다.
동물보호 시민단체 ‘카라’의 전진경 상임이사는 “둔촌주공아파트 길고양이 이주는 전국 재개발·재건축 단지의 하나의 표본이 될 사업”이라며 “길고양이와 같은 동물도 우리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공존의 방법을 모색하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창훈 기자 corazo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