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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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종이통장 사라질 수 있을까

최근 집 서랍 정리를 하면서 종이통장 뭉치를 발견했다. 7년 넘게 무신경하게 둔 것들이 20개가량이나 됐다. 입출금 내역을 정리하느라 다 쓴 일반 입출금통장이 많다. 금융업무 때문에 급하게 은행 창구를 방문했다가 통장이 필요하다고 해 새로 발급받은 것도 있다. 정기예금·적금 통장은 만기 후 재예치하면서 다시 발급받은 것들이다.

통장을 수집하는 취미는 없기에 처리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통장은 계좌번호, 사인 등 중요한 개인정보가 담겨 있어 함부로 버릴 수도 없다. 집에 있는 소형 문서파쇄기를 이용하는 게 최선이었다. 커버와 속지를 일일이 분리하고, 종이를 꾄 실도 최대한 제거한 뒤 투입했다. 이런 작업 과정으로 다섯 개쯤 통장을 폐기하다 그만뒀다.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었다. 다른 날을 기약하며 통장은 다시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사실 지금은 종이통장이 없어도 되는 시대다. 인터넷이나 모바일로 은행에 접속하면 계좌 입출금 내역 및 잔액, 가입한 금융상품, 대출 현황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점포를 방문하지 않고도 비대면으로 계좌를 개설하거나 금융상품에 가입하고, 대출을 받는 등 모든 은행거래도 가능하다. 심지어 창구에서 파는 상품보다 이런 비대면 상품은 금리우대 혜택이 더 크다. 은행 입장에서도 종이통장을 만들고, 관리하는 비용이 적지 않기에 통장이 줄어들면 비용도 일부 절감할 수 있다.

금융당국도 2년 전부터 종이통장 줄이기를 추진하고 있다. 2015년 9월부터 2년간 종이통장을 원하지 않으면 발급받지 않아도 되도록 한 데 이어 지난해 9월부터는 신규계좌 개설 신청서에 발급·비발급을 선택하도록 했다. 2020년 9월부터는 미발급을 기본으로 하고 희망에 따라 비용을 내고 발급받도록 할 방침이다.

그러나 큰 변화는 눈에 띄지 않는다. 나부터도 종이통장 처리를 고민하면서도 당연하게 통장을 발급받는다. 전체적인 종이통장 발급 장수가 감소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창구를 찾는 고객 10명 중 8∼9명은 여전히 통장을 발급받는다는 게 은행 관계자의 말이다.

이유에 대해 일부는 인터넷·모바일뱅킹을 ‘못 믿겠다’는 심리를 지적한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무엇보다 통장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실함’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기 때문인 듯싶다. 과거엔 사람들이 자주 은행 창구를 찾아 저축을 하고 통장을 정리했다. 종이 위에 인쇄된 잔액 숫자가 커지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 뿌듯해했다. 정기적금 통장도 마찬가지다. 매달 일정액의 돈을 입금하고 만기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목돈을 손에 쥔다. 하나, 둘 늘어나는 적금 통장은 그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아끼고 절약하며 생활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이진경 경제부 차장
정부 계획대로 돈을 내고 통장을 발급받게 되면 종이통장은 점점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매년 새해 목표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면 돈 모으기가 상위권에 랭크된다. 알뜰하게 차곡차곡 모아 팍팍한 삶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그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픈 마음이, 한동안 종이통장을 붙들고 있을 것 같다.

이진경 경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