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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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스토리] 꿈 숨긴 채 ‘연극’ 하듯 살아온 삶… 이젠 무대서 연기 꿈 펼친다

부모님 반대·사회생활·軍입대로 포기 / 50대 주부 “이젠 하고 싶은 일 할 것” / 정년퇴직한 70대 “더 늦기 전에 도전” / 생활연극 ‘맹진사댁 경사’ 무대 올라
“나도 몰랐던 나 발견”… 의지 불태워
3남 1녀를 둔 주부 박금옥(53)씨는 ‘맹진사댁 경사’에서 ‘친척 3’ 역할로 등장한다. 지난해 버스정류장에 붙어 있던 생활연극인 모집 벽보에 눈길이 갔을 때 ‘애들 다 키워 놨으니 이제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망설임이나 주저함 없이 전화기를 꺼냈다.

그와 연극의 첫 인연은 여고시절, 개교기념 행사에 셰익스피어 작품의 기억도 안 나는 단역으로 시작됐다. 짧은 출연이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도록 몸에 남았다.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다가 고교 은사가 만든 아마추어 극단을 찾아가 ‘정복되지 않은 여자’에서 아네트의 엄마 역으로 마음을 달랬다. 21살 나이에 할머니 역을 맡은 것이다. 이후 회장실 비서라는 안정된 자리를 사직하고 극단 ‘까망’에 들어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준비했지만 엄마에게 들통나 “머리를 깎아버리겠다”는 엄포에 포기해야만 했다. 결혼을 한 뒤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줄곧 애들을 키우며 살았다.

“이번 공연을 온 가족이 보러 옵니다. 큰아들은 여자친구도 데려온다 했어요. 하하.”

그는 다시 찾은 연극을 계기로 교육연극지도사 자격증을 딸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박금옥
정애경
이번 공연에서 극의 분위기와 균형을 잡는 ‘참봉’ 역은 장애인 활동 보조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애경(55)씨가 맡았다. ‘졸혼’을 한 그는 서른 살 된 딸과 둘이서 산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혼자 해결하며 성균관대 대학원에 다니는 아들은 따로 살지만 그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애경씨는 산전수전 겪어 본 여장부형 중년이다.

“호프집과 추어탕집… 다 망했어요. 보증금 다 까이고. 친정어머니가 차려준 건데. ‘그게 니 돈이었으면 그리 쉽게 접었겠냐’라는 핀잔도 많이 들었죠. 지금은 19살 고3 나이지만 6살로 살아가는 발달장애우와 퇴원한 50살 중증 암환자를 돌보고 있어요. 제가 성격이 밝아서인지 저랑 있으면 더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에 긍정의 힘을 내고 있습니다. 살아갈 의지를 만들어주는 연극이 든든한 버팀목 구실을 해줍니다.”

박영갑
출연자 가운데 최고령자는 맹진사의 숙부 역으로 나오는 76살의 박영갑씨다. 현대건설을 거쳐 현대중공업에서 정년퇴직한 그는 21살 때 신상옥 감독의 영화 ‘피리부는 모녀고개’에 의사로 얼굴을 내민 적이 있다.

“당시 큰고모가 을지로2가에서 일식요리집 ‘금민’을 운영했는데, 신 감독님과 최은희 선생이 단골이었어요. ‘잘생긴’ 얼굴 덕에 화면을 탔지만 군대에 가면서 끊기고 말았죠. 너무 늦은 감도 있으나 더 늦기 전에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타인의 삶을 살아본다는 것, ‘연기’가 지닌 매력이거든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연극 활동을 한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빠듯한 시간을 더 쪼개야 하고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것마저 포기해야 하는 데다 상사의 눈치를 봐가며 별의별 계략을 짜서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연극을 통해 무대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자신’을 표현하려는 욕구는 곧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생활연극협회 회원들이 27, 28일 공연을 앞두고 ‘맹진사댁 경사’ 마무리 연습을 하고 있다.
남제현·이재문 기자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생활연극’이란 말이 마음에 와닿아 찾아왔다는 회사원 김지혜(30)씨는 “협동심을 키워주는 연극, 마음이 하나되는 연극이 좋다”며 “준비하는 과정이 힘들지만, 관객 앞에서 공연을 펼칠 생각을 하면 심장이 크게 뛴다”고 말했다.

“단, 회사 모르게 다니며 연습하느라 몸이 고달퍼요. 연기도 좋지만 생계도 꾸려야 하니…. 제가 모시는 부장님은 이런 활동을 이해하지 못하시거든요. 전업 배우를 하기엔 아직 제가 가진 재능이 어떤지 몰라 겁이 나서 당분간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할래요.”

삼돌이 역의 진주호(38)씨는 “내가 몰랐던 나를 볼 수 있어 연극이 좋다”고 밝힌다. “직장 생활의 에너지를 연극에서 얻는다”는 그도 “동료들에겐 얘기했지만 윗선에는 이야기가 안 들어가게 조심한다”고 털어놓는다.

“아직은 이해해주는 분위기가 아니더라고요. ‘오, 이런 것도 해?’라고 종종 관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일이 바빠질 때면 혹 연극 때문에 집중 못하는 거 아니냐고 질책하듯 묻기도 해 마음을 다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김정민
유모 역할의 김정민(49)씨는 22살 딸과 함께 배우를 꿈꾼다. 그는 최근 연습시간에 김 연출가로부터 연기 지적을 받기도 했다.

“‘유모가 어느 땐가부터 너무 건방져졌어. 유모가 안주인 같애. 감히 대감 앞에서 …. 그렇게 빤히 쳐다보면 안 되지. 재미는 있는데 오버야’라고 꾸짖으셨는데 제게는 다 피와 살이 되는 가르침이죠.”

어릴 적 엄한 아버지 밑에서 ‘연기’란 말도 못 꺼냈는데, 딸 아이는 반대에도 전공을 바꾸면서까지 연기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고, 자신도 서둘러 연극을 시작했다고 들려준다.

이화시
출연자 가운데는 유난히 눈에 띄는 반가운 얼굴도 있다. 배우 이화시(67)다. 맹진사 부인 한씨 역을 맡은 그는 영화 ‘반금련’, ‘이어도’ 등으로 1970년대 ‘김기영 감독의 페르소나’로 불렸던 배우다. 결혼 후 캐나다와 미국에서 20년 넘게 주부로만 지내다 이번에 처음으로 연극에 도전한다.

“마치 중 1때 영어를 처음 배우던 기분으로 발 떼는 것부터 착실하게 배울 겁니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