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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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독수리 5형제 또는 5남매

“다들 ‘독수리 5형제’라고 하는데 여성인 저와 전수안 대법관도 있으니 ‘독수리 5남매’가 정확하지 않을까요.”

2010년 7월 퇴임을 한 달가량 앞둔 김영란 대법관과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독수리 5형제란 2000년대 후반 대법원에 재직한 김영란·박시환·김지형·이홍훈·전수안 대법관을 일컬은 말이다.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맞서는 사안마다 5명이 똘똘 뭉쳐 진보 성향 소수의견을 내 붙은 별명이다.

기자가 화제를 소수의견으로 돌리며 독수리 5형제를 거론하자 김 대법관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농담처럼 슬쩍 ‘남매’ 얘기를 꺼냈다. 1시간쯤 나눈 대화 내용을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으로 줄이다 보니 독수리 5형제 관련 언급은 기사에 빠졌다. 5명이 차례로 임기가 끝나 대법원을 떠나며 독수리 5형제도 신문지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랬던 독수리 5형제가 문재인정부 들어 다시 등장했다. 지난해 원자력발전소 건설 관련 공론화위원장에 김지형 전 대법관을 위촉한 것이 계기였다. 올 들어 사법개혁을 추진할 대법원 사법발전위원장에 이홍훈 전 대법관이 내정되며 ‘독수리 5형제의 귀환’이란 보도가 쏟아졌다. 더러 남매라고 쓴 기사도 눈에 띄었으나 여전히 형제가 대세다.

물론 ‘형제는 남매도 포함하는 개념’이란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형제의 사전적 의미 중엔 ‘형제와 자매, 남매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자매나 남매를 굳이 형제라고 부르는 사례는 거의 접하지 못했다.

1970년대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자로 일하며 워터게이트 사건을 특종 보도한 밥 우드워드는 원래 법조를 오래 출입했다.

그가 1979년 출간한 미국 연방대법원 비사는 국내에 ‘지혜의 아홉 기둥’이란 제목으로 소개됐다. 영어 원제는 형제들 또는 동료들을 뜻하는 ‘더 브레드런(The Brethren)’이다. 대법관 9명이 서로에게 느끼는 진한 동지애가 묻어나는 표현이다.

대법원에 여자가 없던 시절이니 ‘대법관은 으레 남자’라는 고정관념도 함께 배어 있는 듯하다. 미국에 첫 여성 대법관이 탄생한 건 책이 나오고 2년 뒤인 1981년의 일이다.

김태훈 사회부 차장
기자가 막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선생님은 ‘미스터(Mr.)’로 통칭하는 남자와 달리 여자는 미혼이면 ‘미스(Miss)’, 기혼이면 ‘미시즈(Mrs.)’를 붙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정작 영어권 국가들에선 1960년대부터 결혼과 상관없이 ‘미즈(Ms.)’란 통합 호칭을 쓰는 운동이 확산하고 있었다. 미국의 2호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로스쿨 교수 겸 인권운동가로 활약하던 시절 신문에 자기 이름을 ‘미시즈 긴즈버그’라고 쓴 기사가 실리면 꼭 해당 기자한테 전화해 ‘미즈’로의 정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쓰는 어휘에 실은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담겨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행’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세상이 바뀌면 관행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남이 불리고 싶어 하는 그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야말로 배려와 공존의 첫 단추 아닐까.

김태훈 사회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