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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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태극기 응원

조선말 고종 13년인 1876년 1월. 일본은 운양호 사건을 트집 잡아 우리에게 불평등한 강화도조약 체결을 압박했다. “운양호에는 엄연히 일본 국기가 게양돼 있었는데, 왜 포격했느냐”는 것이다. 당시 국기가 뭔지도 몰랐던 조선 조정은 비로소 제정 논의를 시작했다. 1882년 8월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가면서 태극사괘 도안이 담긴 기를 만들었다. 그리곤 고베의 숙소건물 지붕에 게양한 게 태극기 효시다.

분단 이전 남북은 태극기를 함께 사용했다. 1948년 5월1일 북의 노동절 기념식에도 태극기는 단상에 올랐다. 그해 7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첫 인공기를 걸면서 태극기는 북한에서 사라졌다. 그러다 65년 만인 2013년 9월 다시 등장했다. 평양에서 아시안컵 및 아시아 클럽역도선수권대회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가 있던 2002년 광화문은 우리 선수를 응원하는 붉은 악마와 태극기 물결로 뒤덮였다. 전 국민이 하나되는 감동적 모습은 4년마다 전통처럼 이어졌다. 그러나 지난해 정작 애국심을 기리는 광복절을 앞둔 서울 도심에선 태극기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탄핵 국면에서 태극기가 보수단체 집회에 동원되면서 이미지가 실추된 탓이라는 말이 나왔다. 또 젊은 층 사이에선 나라 사랑 관련 정서가 바뀌고 있다고 한다. 애국심 조장, 국가 찬양은 ‘국뽕(국가+필로폰)’으로 조롱받는다.

최근 베트남에선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을 계기로 ‘박항서 신드롬’이 일어나면서 태극기가 각광받았다. 지난 27일 결승전 땐 베트남 국기와 함께 태극기를 흔드는 응원전이 전역을 흔들었다. 남의 나라에서 우리 국기가 더 대접받는 것 같아 씁쓸하다.

평창올림픽 때 ‘태극기 퍼포먼스’를 하자는 2030세대의 목소리가 번지고 있다. 이들은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강행한 정부가 불공정하다며 단단히 뿔이 난 상태다. 같은 맥락에서 개막식 등에 입장할 한반도기를 비토하는 것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엔 “다 같이 태극기를 들자”는 글이 올라 동의가 잇달았다. ‘태극기 들기 운동’이 일어날 분위기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가 가져온 유일한 긍정적 효과다.

허범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