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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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2030세대의 이유있는 北 불신

“야, 우리의 주적이 누구냐?” 이등병 시절 야간 초소 경계를 함께 서던 A선임이 물었다. 바짝 군기가 들었던 나는 당연히 “‘북한’입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철썩’. 뒤통수를 때리는 선임의 손바닥이었다. 선임은 “우리의 주적은 ‘간부’”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초소 바닥에 앉아 “당직사령 오는지 잘 보고 불빛 보이면 깨우라”고 한 뒤 잠을 청했다. 최후방 경남 창원은 ‘북한’과는 멀고 ‘간부’와는 가까웠다.

‘주적=간부’라며 귀가 따갑도록 정신교육(?)을 하던 A선임 입에서 어느 날 처음으로 북한을 겨냥한 적개심을 담은 말이 나왔다. 포상휴가를 위한 ‘척’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육두문자였다. 그는 굳게 닫힌 병영 PC방 ‘사이버지식정보방’ 앞에서 분노하며 ‘김정은 XXX’를 외쳤다.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디도스(DDoS·분산서비스거부) 공격으로 언론사와 은행 등의 홈페이지가 공격받자 부대에서 사이버지식정보방을 임시 폐쇄했기 때문이다. 군 인트라넷과 인터넷은 분리된 망이지만 악성코드 감염과 해킹을 우려해 문을 닫은 것이다.

세상과 연결된 창이 사라지자 A선임을 비롯한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페이스북 접속이 끊기자 일부의 ‘연애 전선’에는 먹구름이 드리우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단절로 생긴 스트레스는 원인 제공자 북한을 향한 분노로 바뀌었다. 디도스 공격이 최후방 병사들의 전의(戰意)를 불타오르게 한 것이다.

그러나 최전선은 달랐다. 북한과의 대치는 전의를 뛰어넘어 생존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2010년 3월 평택 해군2함대 소속의 한 함정에서 근무하던 친구는 천안함 폭침 사실을 전파받고는 처음으로 ‘공포’를 느꼈다고 털어놨다. “내가 탈 수도 있었는데…”라며 지금도 전우에게 보내는 슬픔과 더불어 북한에 대한 공포, 분노의 복합한 감정을 떠올린다.

2010년 11월 연평도 포격으로 국지도발 최고 비상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자 전방 사단에 근무하던 친구는 완전군장을 하고 수색 작전에 투입됐다. “포탄이 날아올까 봐 하늘만 뚫어져라 쳐다봤다”며 그때의 강렬했던 긴장감을 아직도 술자리에서 생생히 풀어낸다.

2010년 이후 이어진 남북의 긴장과 북한의 잦은 도발은 자연스럽게 군 장병들에게 북한에 적대감을 심어줬다. 군에서 느낀 긴장과 공포는 자연스럽게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이어져 직간접적으로 전쟁 위협을 체험하는 계기가 됐다. 

이창훈 사회2부 기자
2010년대에 군에서 복무한 청년들이 기억하는 북한은 개성공단과 금강산을 왕래하던 2000년대의 북한이 아니다. 언제든 우리를 향해 준비된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나라이다. 어쩌면 한 해 15만여명이 남북을 왕래하던 2000년대의 남북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도발과 긴장을 먼저 학습한 2030세대가 남북 교류에 부정적인 시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통일연구원과 아산정책연구원 등의 통일인식분석 조사에 따르면 2030세대는 북한에 대한 불신이 가장 높으며 통일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도 가장 낮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북한과 대화하고 교류를 이어가야 한다면 ‘민족’이라는 당위 이전에 도발의 기억을 극복할 수 있는 ‘남북 평화’의 경험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이창훈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