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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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노시인의 ‘성추문’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로 온 국민이 정신이 없을 때 신문 사회면에 ‘믿기 힘든’ 기사가 실렸다. ‘홀로서기’의 시인 서정윤이 여중생 제자를 성추행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서정윤이 누군가. 1980년대 청춘들이 그의 시를 줄줄 외며 시적 감흥에 흠뻑 젖게 한 인물이다. ‘홀로서기’ 시집은 300만 부나 팔렸다. 그의 추락에 “어떻게 서정윤이…”라며 배신감을 느낀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문단 내의 성추문은 더 가관”이란 소리는 그 일이 있은 얼마 후 듣게 됐다. 문화계 인사들과의 저녁모임에서다. 한 참석자는 알 만한 작가의 실명과 추행 사례를 열거하며 “조만간 (추문이) 터질 것”이라고도 했다. 취중에 한 말이었지만 머지않아 현실로 드러났다. 출판 편집자로 알려진 한 여성은 소설가 P씨가 “자신을 포함한 여성 일곱 명에게 술을 마시자고 강권한 뒤 옆자리 여성을 추행했다”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고발했다. P씨는 그 후 ‘은교 논란’까지 더해져 “선생님도 결국 ‘그런 유의 사람’이었나”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한동안 잠잠하던 문단 성추문이 ‘미투 운동’의 영향으로 다시 터져나오고 있다. 최영미 시인이 지난해 12월 ‘황해문화’ 겨울호에 게재한 시 ‘괴물’이 그제 인터넷과 SNS를 달궜다. 실명을 공개하진 않았지만 ‘노털상(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는 ‘En’이 후배 작가를 성추행한 사실을 폭로한 글이다. 작품 속 ‘En’은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며,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인물이다. 당사자로 지목된 시인은 “오늘날에 비추어 성희롱으로 규정된다면 잘못된 행동이라 생각하고 뉘우친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노시인에겐 “곱게 늙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문학의 가면을 쓰고 신진 작가의 인권을 짓밟는 원로의 추한 민낯이란 지적이 많다.

문단 권력의 갑질을 돌아봐야 한다. 신진 작가들은 유명 작가들이 추천서나 서평을 써주어야 인정을 받게 되는데 이들의 무리한 접촉(?)을 거절하면 문단 내 자리가 없다고 한다. 추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태를 파악하고 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시인인 도종환 장관이 훤히 알고 있는 문단의 일이 아닌가.

박태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