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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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아이비 "아직도 심장박동 늦추는 약 먹지않으면 무대 못 서요"

새 뮤지컬 ‘레드북’ 주연 아이비/2005년 가수 데뷔… 2010년 뮤지컬과 인연/ 작품 ‘키스 미 케이트’ 조연으로 첫 출발/
‘벤허’ ‘시카고’ ‘아이다’ 등에서 좋은 반응/"예전에는 겁없이 ‘끼’로서 공연했지만/ 지금은 부족함을 아니까 더 열심히 해/주인공 안나처럼 용기 있는 사람이 돼/불공정과 편견에 맞서 싸울 수 있었으면…"

‘아이비가 달라졌다.’ 지난해 여름 뮤지컬 ‘벤허’를 본 이들이 공통으로 떠올렸던 생각이다. 배우 겸 가수 아이비는 이전에도 무대에서 사랑스러웠다. ‘시카고’의 록시, ‘아이다’의 암네리스, ‘위키드’의 글린다 모두 능숙하게 소화했다. 그러나 ‘벤허’에서 에스더로 분한 그가 노래한 순간, 공연장을 압도하는 힘이 느껴졌다. 이후 언론에서도 그의 후속작을 눈여겨보는 이들이 하나둘 생겼다. 새 작품 ‘레드북’으로 돌아온 그를 최근 서울 중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아이비는 이 얘기를 듣자 “정말요?”하고 여러 번 반문하더니 “그때 노래 늘었단 얘기 많이 듣긴 했다”고 말했다. 

‘레드북’의 주연을 맡은 뮤지컬 배우 아이비는 “제게 작품이 계속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몹시 만족한다”며 “주변에 너무 잘난 사람이 많아 동료를 통해 자극 받는다”고 말했다.
하상윤 기자

“일단 노래가 저와 잘 맞았고, 그렇게 제 분량이 적은 뮤지컬을 처음 해봤어요. 그래서 노래 연구를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더 탄탄하고, 파워 있는 소리를 내려고 연습했어요. 게다가 예전엔 제가 원래 가진 ‘끼’로 공연했다면 지금은 제가 부족하단 걸 아니까 부지런히 레슨 받고 연구하고, 열심히 남들 영상도 보고 있어요. 아마 그러면서 조금씩 발전했던 게 아닌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해 아이비의 상황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촉매가 된 사건은 2016년 ‘위키드’ 공연이었다. “가사를 원래 잘 까먹긴 했는데 ‘위키드’에서 엄청 틀렸다”는 그는 “이후 ‘내가 실수하면 관객이 나를 욕하지 않을까’ 그 생각에 압박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게다가 배우로서의 책임감, 무대의 압박감도 점점 무겁게 다가왔다. 모든 일이 폭탄 터지듯 한꺼번에 일어났고, 지난해 덜컥 무대 공포증에 걸렸다.

“전 가수로서든 배우로서든 자부심·자신감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아요. 해가 거듭될수록 부담이 커져요. 그래서 작년에 ‘아이다’를 하면서 무대 공포증이 왔어요. 제 나이는 30대 후반으로 가고 있고, 멋진 후배들은 올라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실력이 최고가 아닌 것 같은데’ 싶고… 여러 가지 생각에 짓눌렸어요.”


공포증에 따른 긴장감은 극심했다. 무대에서 피가 전혀 안 통해 팔이 저릴 정도였다. 아직도 심장박동을 늦추는 처방약을 먹지 않으면 무대에 못 올라간다. 그는 “누가 나를 앞에서 보는 순간 그렇게 된다”며 “제가 생긴 게 당당하고 여시 같으니 남들은 ‘니가 무슨 무대 공포증이야’ 한다”며 웃었다.

“처음에는 ‘그만둬야 하나,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거 하다가 빨리 죽는 거 아냐’ 싶어 되게 슬펐어요. 이제는 계속 잘 되고, 나 잘난 맛에 살았으면 지금 주어진 일의 감사함을 몰랐을 거란 생각도 들어요. 더 열심히, 겸손히 할 기회라고 생각하니 받아들여지더라고요. 이제 전 욕심이 하나도 없어요. 제 약함을 깨닫고 제가 부족한 사람임을 알게 됐으니까요.”

그는 “저를 돌아보니 제가 못난 사람이란 게 매일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일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다’라고 되새긴다. ‘무대에 서지 못해도 나는 사랑받는 존재고, 이게 아니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럼에도 뮤지컬을 고집하는 이유를 묻자 그는 “무대가 애증의 관계가 됐다”고 명쾌하게 답했다. ‘사랑하는데 아프고 미운’ 남녀관계 같단다. 2005년 가수로 데뷔한 아이비는 2010년 ‘키스 미 케이트’의 조연으로 뮤지컬과 인연을 맺었다.

“떠날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돼요. 무대에서 박수 받을 때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가 안 되는데, 무대에 서기 전 두려움과 공포는 너무 힘겨우니까요.”


무대를 지키고 싶다는 그는 “제가 가진 밝은 느낌을 관객에게 주고 싶다”며 “(이전 출연작인)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최악의 비극이어도 ‘저 여자가 너무 밝아서 힘든 일을 딛고 일어서는구나’ 느껴지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에 그가 연기하고 있는 ‘레드북’의 안나 역시 씩씩한 여성이다. 보수적인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해 글을 쓴다. 자신의 욕구를 발랄하게 표현하며 금기에 맞선다.

“여자가 글 쓰는 것조차 금지된 시대에 그렇게 당당, 당돌하고 깨어 있는 여성이라니. 이건 우리 모두의 얘기일 것 같아요. ‘세상의 편견을 깨고 당당해져라, 앞으로 나와라’라는 메시지니까요. 전 사실 편견에 맞서거나 당당하게 나서는 걸 잘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불리한 일을 당해도 ‘왜 그래야 돼’라고 못해요. 안나를 만났으니 저도 용기 있는 사람이 돼 불공정과 편견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레드북’을 하며 그는 사회문제를 공부하고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소셜미디어(SNS)에 패션·요리 같은 것만 올리다가 다른 걸 올리면 사람들이 거부할지도 모른다”고 농담한 그는 “나도 사회·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인데…”라고 덧붙였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