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미(57·여)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의 현실 진단은 냉정했다. 2008년부터 10년간 지원 사업을 하면서 미혼모를 둘러싼 척박한 현실에서 얻은 결론이다. 미혼모라는 이유만으로 이뤄지는 차별은 없어야 하며 주어진 권리를 행사할 최소한의 사회적 인식과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는 게 박 대표의 주장이다.
미혼모를 터부시하는 인식의 뿌리는 깊다. ‘혼전동거’, ‘혼전임신’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 지 오래됐으나 미혼모만은 여전히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애써 외면한다는 게 옳다.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가 혼자 아기를 낳아 기르는 걸 입에 올리기조차 꺼림칙해한다. 비윤리적인 일로, 혹은 범죄라도 되는 양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박영미 대표가 최근 세계일보와 인터뷰에서 미혼모들이 차별받지 않고 권리를 행사할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제공 |
18일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미혼모는 2만4000여명, 미혼부는 9000여명이다. 신분을 밝히길 꺼리는 현실을 감안하면 미혼부모 숫자는 파악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 대표는 그동안 쉬쉬한 미혼모에 대한 논의를 양지로 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남편과 아이 셋을 키우며 여성노동자를 돕다 우연한 계기로 미혼모들을 만난 뒤 인생의 2막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미혼모들은 우리 사회의 약자인 여성 중에서도 더욱 소외되고 열악한 환경 속에 살고 있다. 지난달 31일 한 여대생이 홀로 아이를 낳은 뒤 ‘아파트 복도에서 버려진 신생아를 구조했다’며 자작극을 벌인 사건은 이런 현실과 무관치 않다.
“직장을 다니던 미혼모가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못 받아 퇴사하는 경우가 무려 97%입니다. 법률적으로 결혼하지 않았으니 육아휴직이 안 된다는 규정은 없습니다. 청소년 미혼모 경우에는 학교를 떠나도록 강요받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고, 결국 사회 취약 계층으로 전락해 생계 위기에 처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박 대표는 “미혼모가 아이 키우는 부담을 혼자서 감당하지 않고 아이 아빠도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정부가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미혼모가 되는 순간 불행으로 접어드는 상황을 깨뜨려야 한다는 공감대가 그나마 요즘 조금씩 형성되고 구체적인 움직임도 있다. 그중 하나인 ‘비밀출산법’은 적어도 갓 태어난 아기를 스스로 버리는 비극을 막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8일 오신환 바른미래당 의원이 대표발의한 비밀출산법은 임산부가 원하는 경우 신분을 밝히지 않고 출산하고 가명으로 출생등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 대표는 자칫 이 법안이 ‘사후약방문’에 그칠 수 있는 만큼 근본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비밀출산법은 기존 베이비박스 제도보다 한 단계 발전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미혼모들이 새로운 가족 형태로 인정받고, 학습권과 근로권 등까지 보장받는다면 굳이 아이를 낳아 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혼모를 장려하는 것도 아니고, 특혜를 달라는 것도 아니다”라며 “미혼모들도 차별 없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권이선 기자 2su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