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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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지금] “총은 안돼요” 10대들의 외침… 美 총기규제 힘 실리나

개인의 무기 소유권리 폭넓게 인정/ 규제법안 공화 반대로 번번이 부결/“美 총기협회와 검은 거래” 거센 비난
“총기 규제 강화는 수많은 표가 걸린 사안이라서 후보들이 몸을 사린다.”

2012년 7월,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그해 11월 대선에서 맞붙는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과 밋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가 총기 규제에 미온적 입장을 보인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앞서 콜로라도주 덴버의 한 영화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최소 12명이 숨지고 70여명이 다쳤는데도, 선거를 앞둔 후보들이 ‘표심’을 먼저 살폈다는 것이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직후인 2012년 12월에는 코네티컷주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어린이 20명과 교직원 6명이 희생됐다. 범인은 6∼7살 아이들을 교실에 가둬 놓고 총격을 퍼부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모든 걸 쏟아붓겠다”며 총기 규제 강화에 매진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미 국민 90% 이상이 찬성한 ‘모든 총기 구매자에 대한 신원조회’ 법안은 상원에서 55명의 찬성표를 얻었지만 5표가 부족해 사장됐다.

2016년 6월, 미 역사상 최악의 테러 중 하나로 꼽히는 플로리다주 올랜도 총기 테러가 발생한 직후에도 미 상원은 총기 규제 법안 4건을 무더기로 부결시켰다. 공화당 반대로 사라진 이 법안에는 미 연방수사국(FBI)의 테러행위 의심 감시대상자 모두에게 총기 구매를 불허한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미국에서 매년 총기 사건이 발생할 때면 규제안이 마련되지만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는 게 일상이 됐다. 2016년까지 5년 동안 발의된 100건 이상의 총기 규제 법안이 모두 의회에서 부결됐다. 공격용 무기 판매 금지, 대용량 탄창 제한, 불법 무기 밀매 처벌 강화 등의 방안도 거부됐다.

지난달 14일 플로리다주 마조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총기 규제 목소리가 다시 거세지고 있다. 오바마도 하지 못한 일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해낼 수 있을까. 어린아이들이 하릴없이 죽어가는 상황인데도 총기 규제가 강화되지 않는 배경 등을 살펴봤다.
플로리다 총격에 분노한 10대들 미국 플로리다주 마저리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에서 발생한 무차별 총격사건으로 학생 17명이 희생된 이후 미 전역에서 총기규제를 촉구하는 10대 학생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BBC방송 홈페이지 캡처

◆‘총기 소유’에 관대한 미국… 헌법이 보장?

총기 사건으로 애꿎은 아이들이 희생될 때마다 ‘왜 총기를 규제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미국 안팎에서 제기된다. 이에 식민지 시대를 거쳐 여러 주가 모여 국가를 이룬 것, 드넓은 땅에서의 치안 부재 문제 등으로 총기 소유가 자유롭다는 설명이 뒤따른다. 더글러스 고교에서 총기를 난사한 니콜라스 크루즈(19)도 주법에 따라 18세 이상이면 살 수 있는 반자동소총(AR-15)을 합법적으로 구매해 범행에 사용했다.

1791년 제정된 수정헌법 2조는 미국 건국 이후 중앙권력에 대한 견제세력으로서 지역 민병대를 유지하는 것을 고려해 작성됐다고 한다. 미 연방대법원은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State)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하는 국민 권리는 침해될 수 없다’는 이 조항을 광범위하게 해석해 왔다. 총기 옹호론자들은 규제 움직임이 거셀 때마다 이를 들어 “미국은 총기 소유가 합법인 나라”라고 강변해 왔다. 수정헌법 2조는 특히 개인의 무기 소유·휴대 권리를 폭넓게 인정하는 근거로 인용됐다는 분석이 많은데, 2010년대 들어 대법원의 판단이 변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대법원은 2013년 메릴랜드주 정부의 AR-15 소지 금지, 플로리다주의 ‘오픈 캐리’(공개적인 총기 휴대) 금지 등에 대해 총기 옹호 단체인 미국총기협회(NRA)가 제기한 위헌소송에서 주정부 손을 들어줬다. 최근 NRA가 캘리포니아주의 총기 규제가 위헌이라고 제기한 2건의 소송도 기각됐다. 연방법에도 비슷한 판단이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미국 플로리다주 브로워드카운티 연방법원 앞에서 시민들이 ‘대량살상용 총기 규제 등을 담은 새로운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내용의 손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포트로더데일=AFP연합뉴스
◆“총기 규제 강화해도 사망사고 줄지 않을 것”

미국 CNN방송과 여론조사기관 SSRS가 더글러스 고교 총기 난사 사건 발생 일주일 후 1016명을 여론 조사한 결과 ‘총기 규제 강화’에 대한 찬성여론은 70%에 달했다. CNN은 지난해 10월 라스베이거스 총기 참사 당시 52%에 불과한 찬성여론이 넉 달 새 28%포인트 급상승했다고 전했다.
미 언론은 여론 변화 배경으로 10대들이 발 벗고 나선 점 등에 주목했다. 이번 사건의 피해 학생들은 NRA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더니, 백악관과 의회 앞에서 총기 규제 강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1999년 4월 콜로라도주 컬럼바인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 참사 이후에 태어난 세대를 ‘총기 난사 세대’로 규정, 이들이 성인이 되면서 적극적으로 총기 규제 목소리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총기 규제 강화의 효과에 대한 미 국민의 판단은 냉정하다. CNN·SSRS 조사에 따르면 총기 규제를 강화하면 총기 사망이 줄어들 것이라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56%였다. 세부적으로 조사대상 ‘남성’의 48%, ‘백인’의 50%, ‘트럼프 지지자’의 18%만 총기 규제 강화 효과를 신뢰했다. 총기 사고 상당수가 불법 거래 총기에 의해 발생하는 점, 미등록 총기에 대한 불안감과 이에 대한 처리 문제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다.

CNN·SSRS 여론조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전체 총기 소유를 금지하는 데 찬성한 미국민이 11%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10명 중 9명은 잇따른 총기 사고에도 ‘총기 소유 필요성’이나 ‘총기 규제의 허점’에 주목한 셈이다.

‘21세 미만의 총기 구매를 금지’(71%)하고, ‘흉악범이나 정신질환자의 총기 소유를 불허’(87%)하거나 ‘소유 가능한 총기 수를 제한’(47%)하자는 등의 대책에 비해 전체 총기 금지에 대한 찬성이 턱없이 낮은 것은 총기가 개인 방어 대책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AR-15광고’ NRA가 집어삼킨 미국의 미래?

수많은 아이가 총기 사고로 희생됐음에도 총기 규제가 느슨한 것은 NRA의 로비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더글러스 고교 학생들도 백악관 앞 시위에서 ‘법을 만드는 주체는 의회인가, NRA인가?’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특히 이 학교 학생 엠마 곤잘레스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NRA로부터 돈을 얼마나 받았는지 묻고 싶다”며 “NRA로부터 돈 받은 모든 정치인은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 언론은 NRA가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정치인을 중점적으로 후원하고 있다면서 전체 후원금의 80∼90%가 공화당 의원들에게 돌아간다고 지적했다. NRA가 지난 대선에서도 트럼프 대통령 측에 3000만달러(약 325억원) 이상을 쏟아부었다고 미 언론은 전했다.

NRA는 최근 더글러스 고교생들과의 토론에서 “총기 사고는 총기로 막아야 한다”며 학교 내 무장 병력 배치 등을 대안으로 주장했다가 비난을 샀다. NRA는 남북전쟁 이후 병사들의 사격 실력 향상을 위해 1871년 설립됐다. 1970년대부터 총기 소유자의 권익을 대변하며 총기 규제 반대 로비를 본격화했다. 각 주가 행하는 총기 규제에 대한 위헌소송을 제기하고, 각종 예산안 심사과정에서 총기 확산에 도움되는 조항을 몰래 끼워 넣어 왔다고 미 언론은 지적했다.

NRA의 광폭 로비는 계속되겠지만 현재 총기 규제 강화 여건은 어느 때보다 좋은 편이다. 기업들이 NRA 후원계약 등을 중단하기 시작했고, 대법원도 총기 문제에 대해 다소 전향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평가다. 딕스스포팅굿즈, 월마트, 크로거 등 총기 유통업체들이 자사 매장에서 21세 미만에게 총기를 판매하지 않기로 했고, 일부 총기 제조업체 CEO는 이번 참사에 유감을 표하고 대책 마련에 고심하겠다고 밝혔다. 여기다 NRA의 지지를 받은 게 자랑스럽다고 밝힌 트럼프 대통령도 총기 구매자 신원조사 확대, 총기 소지연령 21세로 상향, 자동소총으로 개조하는 도구인 범프스탁 판매 중단 등의 대책을 제안하고 나섰다.

공화당 지도부가 이 제안에 부정적이지만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을 끌어올려야 하는 절박한 입장이라는 점에서 이번에는 미국 땅에서의 총기 규제가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커지고 있다.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