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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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수줍게 뽀얀 얼굴 내밀고 누굴 애타게 기다릴까

봄이 오는 길목 부안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수줍게 고개를 내민 변산바람꽃은 청림바람꽃, 변산아가씨로도 불린다.
수줍은 듯 슬며시 고개를 내민다. 남들은 아직 숨죽이고 있음에도 뭐가 그리 궁금한지 고개를 내밀어 모진 바람을 먼저 맞는다. 스산한 바람결을 헤치고 비추는 따스한 햇살을 누구보다 먼저 맞으려 고개를 내민 듯싶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햇살을 품겠다는 듯 아침 녘의 해가 빨리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자신을 압도하는 나무와 풀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틈을 뚫고 비추는 햇살 사이로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다.

봄의 전령사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딱 이맘때 날씨 같다. 화창한 햇살 한 자락에 완연한 봄을 느끼다가도, 꽃샘추위 한 번에 봄은 아직 멀었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분명 원하던 봄은 오고 있다. 고개를 숙여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면 분명 봄의 전령사는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때가 지나면 매화,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등 누구라도 봄이 왔음을 알 수 있는 대표주자들이 고개를 내밀 것이다. 누구나 봄이 왔음을 알기 전, 먼저 봄의 문턱을 넘은 전령사의 몸짓은 전북 부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줍게 모습 드러낸 봄의 전령사

부안이란 지명보다 변산 또는 변산반도가 더 익숙할 수 있다. 바다가 먼저 떠오를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변산은 산이다. 바다 쪽을 외변산, 내륙의 변산을 내변산으로도 부른다. 봄의 전령사를 찾으려면 바다보다 내륙으로 가야 한다.

내변산 자락 청림마을에는 봄의 전령사, 변산바람꽃이 활짝 펴 봄이 문턱을 넘었음을 알리고 있다.

소의 뾰족한 뿔과 닮았다고 붙여진 쇠뿔바위 아래에 자리 잡은 청림마을은 과거 변산의 4대 사찰 중 하나인 청림사가 있던 곳이다. 청림사는 조선 이인좌의 난 때 불타버렸고 이후 마을 사람들이 밭을 갈다 우연히 동종을 발견했다. 보물로 지정된 이 동종은 현재 내소사로 옮겨졌다.

청림마을에서 변산바람꽃을 보려면 바람꽃할머니로 알려진 최봉성 할머니댁을 지나야 한다. 변산바람꽃을 보러 온 이들이 스쳐 지나가는 곳이다. 집에 문도 딱히 없다. 할머니집 마당을 지나 밭을 건너야 군락지가 나온다.
봄의 문턱을 넘은 전령사의 몸짓은 부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군락이라지만 진달래, 철쭉처럼 흐드러지게 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경사진 산비탈 양지 바른 곳에 다소곳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빨리 훑어보면 찾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수줍게 고개를 내민 변산바람꽃은 청림바람꽃, 변산아가씨로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 피는 20여종의 바람꽃 중 변산바람꽃은 가장 먼저 핀다. 이름에 지명 변산이 들어간 것도 이곳에서 처음 발견됐기 때문으로 학명에도 반영돼 있다.

변산바람꽃은 꽃잎처럼 보이는 하얀 부분이 꽃받침이다. 그 안에 노랑과 초록이 섞인 깔때기 모양의 진짜 꽃잎이 있고, 연보라색의 수술, 노란 꿀샘이 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햇빛이 강하지 않은 이맘때 피다 보니, 영양을 충분히 보충하기 위해 개화시간도 길다.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은 시기에 땅을 뚫고 나오기에 일반적으로 잎이 먼저 나오는 꽃과는 다른 생존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다. 줄기까지 해도 크기가 10㎝ 정도에 불과하다. 완연한 봄도 아닌 날씨에 매우 가냘픈 체구에서 꽃을 피운 모습이 애처롭게 다가온다. 기다림을 뜻하는 꽃말이 와닿을 수밖에 없다.

변산바람꽃을 보려면 주위를 잘 살펴야 한다. 꽃을 찾기 힘들어서라기보다, 봄을 그렇게 기다리며 겨울을 힘겹게 이기고 핀 꽃을 짓밟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거친 발걸음 하나하나에 애써 모습을 드러낸 봄이 사라질 수 있다.
◆우렁찬 봄의 소리 내는 직소폭포

청림마을에서 차로 10분 정도 가면 내변산분소다. 조용히, 수줍게 봄을 알리는 변산바람꽃과 달리, 우렁찬 봄의 소리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변산은 높이 508m의 의상봉을 비롯해 10여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로 이뤄졌는데, 힘들게 이 봉우리들을 오르지 않아도 봄을 만날 수 있다. 높이 30m 암벽에서 쏟아지는 직소폭포의 물줄기가 주인공이다. 봄 가뭄에도 어디서 물을 그리 많이 끌어모았을까 싶을 정도로 시원하게 물줄기를 내리꽂는다. 이 궁금증의 해답은 내변산분소에서부터 1시간가량 거리에 떨어져 있는 직소폭포 가는 길을 걸어보면 알 수 있다.

내변산 중심에 자리 잡은 직소폭포는 조선시대 여류 시인 매창 이계생, 촌은 유희경과 함께 부안삼절로 꼽힌다. 내변산 자락 반대편에 있는 내소사가 연중 사람들로 북적거린다면, 직소폭포 가는 길은 새와 바람, 계곡 등 다양한 자연의 소리가 함께한다.
변산 직소폭포 가는 길의 계곡이 봄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변산의 산중 호수 직소보에선 관음봉의 자태와 호수의 푸른 물빛에 탄성이 나온다. 외국의 유명 여행지가 부럽지 않은 풍광이다.
직소폭포 탐방은 내변산분소에서 시작된다. 길 초입에 만나는 실상사는 거의 터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때 초의선사가 창건한 실상사는 한국전쟁 때 불타고, 미륵전과 삼성각만 복원됐다. 길가엔 초록빛 융단이 펼쳐져 있다. 초록잎들이 대지를 뚫고 나와 흙빛을 초록빛으로 바꾸고 있다.

완만한 길을 걷다 낮은 언덕을 오르면 예상치 못한 풍경을 마주한다. 산중 호수 직소보를 만난다. 건너편 관음봉의 자태와 호수의 푸른 물빛에 탄성이 나온다. 외국의 유명 여행지가 부럽지 않은 풍광이다. 호수를 따라 이어진 나무데크에선 한 번쯤 뒤를 돌아보자. 이미 지나온 전망대를 바라보면 호수에 흰 절벽의 반영이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직소보에서 20분 정도만 가면 직소폭포 전망대를 만난다. 전망대에선 멀찍이 떨어진 직소폭포의 호쾌한 물줄기가 곧게 낙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폭포가 떨어지는 곳에 소가 있는데 실상용추로 부른다. 등산길 초입의 실상사에서 유래했다. 실상용추의 물은 전망대 아래에서 작은 폭포를 만들고 분옥담, 선녀탕 등 소를 이룬 뒤 아래로 흘러내린다. 직소폭포를 더 자세히 보려면 좁은 산길을 거쳐 폭포 앞까지 다가서야 한다. 수량이 적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장쾌한 물줄기를 이루며 수직낙하하고 있는 직소폭포의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폭포까지 가는 길은 군데군데 땅이 녹아 질퍽하게 변해 있다. 비가 오지 않아도, 봄이 돼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머금고 있던 물이 폭포의 물줄기로 변신한 것이다. 폭포 소리만 들어도 봄이 깨어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낀다.
변산 직소폭포가 장쾌한 물줄기를 이루며 낙하하고 있다. 직소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전망대 아래에서 다시 작은 폭포를 만들고 분옥담, 선녀탕 등 소를 이룬 뒤 아래로 흘러내린다.
변산의 봄 풍경을 더 보고 싶다면 직소폭포를 지나 내소사까지 코스를 추천한다. 변산 등반코스 중 가장 편한 코스다. 직소폭포를 지나 재백이고개에 이르면 확 트인 곰소만을 감상할 수 있고, 관음봉 삼거리를 지나 내소사로 내려가면 된다. 다만 차량을 내변산분소에 두고 산행을 했다면, 내소사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든가, 코스 중간에 복귀해야 한다. 편도로 3시간 정도 걸리니 시간 안배가 필요하다.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삼절인 매창 이계생의 묘와 시비가 있는 매창공원.
직소폭포와 함께 부안삼절인 매창 이계생, 촌은 유희경의 사랑 얘기도 짚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매창은 황진이와 비길 만한 문장가이자 명기로 시와 거문고가 뛰어났다. 촌은 유희경은 천민 출신이지만 시를 잘 짓기로 유명해 많은 양반들과 교류했다. 둘은 28살의 나이 차이에도 서로에게 끌렸다. 아마 둘 다 높지 않은 신분이라는 공감대와 시에 능했다는 점 때문에 통했을 듯싶다. 매창은 부안에, 촌은은 서울에 살고 있어 자주 보지 못했지만, 둘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애틋한 시를 남겼다고 한다. 매창은 38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는데, 거문고를 함께하고 싶다는 그녀의 말에 따라 무덤에 거문고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매창공원에 그녀의 무덤과 함께 그녀가 지은 시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전북 부안 계화도는 섬이었지만, 육지와 방조제로 연결됐다. 식량자급을 위해 대한민국 제1호 간척사업인 ‘계화도 간척공사’를 추진한 곳이다. 계화도에선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붉게 하늘을 물들이는 분위기 있는 서해 일출을 볼 수 있다.
◆소나무 위로 뜨는 서해 일출

내변산을 봤으면 이제 외변산을 둘러볼 차례다. 부안 외변산의 대표는 채석강이다. 중국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달빛 아름다운 밤, 뱃놀이를 하며 술을 즐기다 강물에 비추어진 달을 잡으러 물에 뛰어들어 그 삶을 마감하였다는 장소에서 이름을 따왔다. 퇴적암이 층층이 쌓여 수많은 책을 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는 채석강은 썰물 때를 맞춰가야 한다. 파도가 만든 해식동굴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격포항 부근에 있는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 밖을 바라보면 동굴 입구 형태에 따라 하늘과 바다, 바위들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 밖을 바라보면 동굴 입구 형태에 따라 하늘과 바다, 바위들이 어우러진 독특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부안 채석강은 퇴적암이 층층이 쌓여 수많은 책을 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파도가 만든 해식동굴에 들어가려면 썰물 때를 맞춰 가야 한다.
부안에는 계화도라는 작은 섬이 있었다. 섬이었지만, 육지와 방조제로 연결됐다. 1944년 일제강점기 때 간척공사를 시작했다 중단됐고,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될 때 식량자급을 위해 대한민국 제1호 간척사업인 ‘계화도 간척공사’를 추진한 곳이다. 방조제를 건너면 한편으로 광활한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간척사업의 결과다. 1978년부터 쌀이 생산됐고, ‘계화미’라는 상표로 명성을 얻었다. 쌀을 얻었지만 백합을 잃었다. 계화도 일대 갯벌은 백합산지로 유명했는데, 간척사업 등으로 명성이 예전만 못해졌다.
 
광활하게 펼쳐진 간척지 모습보다 계화도에선 서해에서 보기 힘든 분위기 있는 일출을 볼 수 있다. 동해의 일출이 수평선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풍경이라면 계화도 일출은 방죽(뚝방)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 사이로 해가 뜬다.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붉게 하늘을 물들이는 일출은 바다에서 바로 해가 뜨는 풍경과는 다른 운치를 선보인다.

부안=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