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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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스토리] 실시간 통역 ‘척척’… 외국어 울렁증 ‘뚝’

세계 74억명 인구가 6909개 언어 사용 / 과거 높았던 언어 장벽 점차 허물어져 / ‘인공신경망’ 기술 적용 기계학습 가능 / 어순·의미 스스로 학습 번역 품질 높여 / 103개 언어 지원 ‘구글번역’ 가장 보편적 / 네이버 검색엔진 활용한 ‘파파고’도 눈길 / 한컴 ‘지니톡…’ 오프라인서도 활용 가능 / 직장인들은 “업무의 편의성 높아져” 반색
언어의 사용은 사람과 동물을 구분하는 중요한 잣대로 꼽힌다. 호모사피엔스의 등장과 함께 발달하기 시작한 언어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며 지역과 문화 등에 따라 다르게 형성됐다.

종교계에서는 지역별 언어가 다른 것은 ‘신이 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쌓아올린 바벨탑을 본 신이 이를 용납하기 어려워 각기 다른 언어를 사용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결국 지구에 수많은 언어가 존재하면서 인류의 커뮤니케이션에는 불편함이 생겼다. 하지만 번역기가 등장하면서 이 문제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날로 진화하는 번역기는 지역과 문화의 장벽을 허물고 신이 내린 형벌까지 극복할 기세다. 

23일 언어다양성보존활용센터에 따르면 전 세계에는 현재 6909개의 언어가 살아 등록돼 있다. 세상의 모든 언어가 확인되지 않은 만큼 이 이상의 언어가 존재할 것으로 추측된다.

올해 1월 기준 74억명의 전 세계 인구 중 1억명 이상의 인구가 사용하는 언어는 중국어와 스페인어, 영어, 아랍어, 힌디어, 일본어 등 9개에 불과하다. 1000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언어는 85개다. 번역기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역할을 한다. 기존의 번역기는 글자를 그대로 바꿔주는 형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구글을 시작으로 번역기에 ‘인공신경망’ 기술이 적용되면서 발전속도가 가속화하고 있다.

인공신경망이란 인간 두뇌에 뉴런(신경계와 신경조직을 이루는 기본단위)이 연결돼 동작하는 모습을 본떠 만든 기술로 기계학습이 가능하다. 기계학습이란 프로그램에 일일이 작동법을 입력하지 않아도 예시를 통해 기계 스스로 훈련하는 플랫폼이다. 예컨대 고양이 사진을 몇 장 보여주면 프로그램이 이를 숙지하고 고양이를 인지하는 것이다.

이 기술이 적용되면서 번역기는 언어의 어순과 의미를 이해하고 스스로 학습해 번역 품질을 향상시킨다. 예컨대 ‘밤을 먹었다’를 영어로 바꿀 때 일반 번역기는 ‘밤’이 견과류인지 낮의 반대를 뜻하는 단어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하지만 인공신경망기술은 ‘먹었다’라는 동사와 어울리는 ‘밤’을 찾아 번역해 주는 식이다.

‘구글번역’은 가장 보편적인 번역기로 꼽힌다. 2006년 4월 영어와 중국어,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지원했던 이 엔진은 현재 103개 언어를 지원한다. 구글은 ‘워드렌즈’를 사용하면 카메라에 비춘 문자를 원하는 28개 언어 중 하나로 바꿔 보여준다. 또 대화할 때 사용한 언어를 알아듣고 32개 언어 중 하나로 번역해 읽어준다. 구글엔진은 5억명의 이용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하루 1000개 단어를 번역해 준다. 2016년부터 인공신경망을 적용한 한국어 서비스도 지원 중이다.

네이버 역시 인공신경망을 적용한 번역서비스 ‘파파고’를 지난해 7월 정식 출범했다. 네이버가 국내에서 가장 활성화된 검색엔진인 만큼 관련 데이터를 파파고에 적용해 한국어와 영어의 자연스러운 번역을 제공한다.

한글과컴퓨터 역시 ‘한컴 말랑말랑 지니톡’ 번역 서비스를 내놨다. 지니톡은 한컴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함께 개발했다. 한컴은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번역이 가능한 ‘지니톡 오프라인’을 선보였고 이 제품은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무상으로 배포돼 선수들 등 참가자들에게 번역 서비스를 제공했다. 카카오 역시 번역 플랫폼인 카카오아이(I)를 인공지능(AI) 스피커인 카카오미니와 미디어다음 등에 탑재할 계획이다. 특히 카카오는 우리말의 높임말과 예사말까지 구분해 주는 번역기는 물론 외화의 자막도 자동으로 바꿔주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일본의 정보기술(IT)업체인 그로바는 몸에 착용할 수 있는 웨어러블 번역기 ‘알리’를 출시했다. 인터넷 없이 0.2초 만에 한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번역해 준다. 

직장인들은 번역기의 발전이 반갑다. 특히 공부해보지 않은 언어까지 우리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되면서 업무의 편의성이 높아졌다. 해외 관광업체에 근무하는 곽지은씨는 “페루관광청과 일하면서 스페인어를 활용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다”며 “스페인어로 된 기사나 보고서 등을 번역기를 통해 한국어와 영어로 바꾼 뒤 읽어보면 뜻을 금방 이해할 수 있어 편리하다”고 말했다.

영어통번역사인 임민경씨는 “외국어에서 넘어온 전문 법률용어나 회계언어 같은 경우도 어색하지 않게 번역해 준다”며 “작업량이 많을 때 번역기의 도움을 받으면 처리 속도를 높일 수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자녀가 외국어를 잘하길 희망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영어 교육에 번역기를 활용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전문가들의 의견도 이 부분에서 갈린다. 번역기의 편리함에 길들여진 학생들이 어려운 부분을 만나면 번역기를 활용해 문제를 해결해 부정적일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류우승 반석고등학교 영어교사는 “번역기를 한번 사용하게 되면 학생들이 편리함에 익숙해져 빠져나오기 어렵게 된다”며 “하나씩 외국어를 배워야 하는 시기인 만큼 지름길을 알려주기보다 제대로 된 길을 걷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반면 하나의 보조도구로 사용할 경우 영어의 접근성을 낮출 수 있어 긍정적이라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채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부연구위원은 “계산기가 있다고 학생들이 수학공부를 안하지 않는 것처럼 번역기가 외국어 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하고 싶은 말을 영어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로 번역기를 사용할 경우 공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정필재 기자 rus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