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A는 왜 유령사원이 되었나

“저는 회사를 배회하는 유령사원이었습니다.”

얼마 전 퇴사한 후배 A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입사 이후 업무를 배정받지 못한 채 시간만 때우다 퇴근했다고 한다. 오죽했으면 자신을 ‘유령’에 빗댔을까. 급여는 대기업보다 적어도 경력을 쌓을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중소기업을 선택했지만 현실은 기대한 것과 달랐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업무가 바뀌었고 잔심부름만 하다 퇴근하는 날도 허다했다. 경력 단절이 싫었지만 결국 자괴감이 앞서 사표를 냈다고 A는 전했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
애초에 A를 고용한 회사는 인력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지원금을 받고자 A를 고용한 것이었다. 편하게 놀며 돈까지 받았으니 괜찮지 않으냐고 위로했지만 사실은 A에게 엄청난 손해였다. 지속가능하지 않은 회사를 선택한 대가로 ‘미래소득’과 기회비용을 날렸기 때문이다. 사회초년생 때 권한 있는 업무를 맡으며 실력을 쌓는 게 목표였던 A로서는 시간만 낭비했다. 원인은 중소기업에 대한 무차별한 정부지원금이었다. 지원금이 기업의 정확한 고용여력에 대한 잘못된 ‘신호’를 보냈기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다.

정부가 34세 이하 청년을 고용한 중소기업의 혜택을 대폭 늘리고 중소기업을 선택한 청년들에게는 지원금을 제공하겠다는 구상 역시 이런 측면에서 구직시장 자체를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실제 수요가 없고 고용여력도 없는 성장성 낮은 기업이 고용을 늘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직자들 입장에서도 해당 중소기업의 업무여건과 잠재력을 과대평가할 위험이 커진다. 자칫 과잉수요와 과잉공급의 연쇄작용을 유도하며 자원배분의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다.

중소기업은 대기업보다 업종과 회사별로 성장성의 편차가 크다. 게다가 기업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시장에서 활발하게 공유되지도 않는다. 구직자들이 유망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을 판별하는 과정에서 대기업보다 더 신중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정부가 실업난을 해소하겠다는 ‘선한 의도’로 중소기업 지원금을 늘리면 구직자들 입장에서는 유망기업을 판별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잠재력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정해진 수명을 넘기며 더 필요한 곳에 투입돼야 할 자원을 좀먹을 확률도 높아진다.

중소기업을 다니고 있는 주변인들은 인사업무에 대한 컨설팅, 직원역량강화 교육, 특허관리, 중소기업 여건에 대한 정보제공플랫폼 강화 등이 자금지원보다 더 시급하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기술 잠재력이 있지만 특허관리를 못한 탓에 해당 기업이 망하는 경우도 있다. 인사관리역량이 부실해 인재 유출을 방치하는 회사들도 많다. 직원들에 대한 역량강화훈련 역시 대기업에 비해 훨씬 뒤처진다.

‘100세시대’에 평생직장의 개념은 이미 사라졌다. 지속가능한 미래소득 확보를 위해 당장의 직장 간판보다 장기적인 경력관리와 기술력 획득이 중요하다고 믿는 청년들이 늘어났다. 정부는 중소기업을 선택한 청년들도 그런 믿음을 갖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세금을 써야 한다.

김라윤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