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정봉주 전 통합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BBK 주가조작 연루 의혹을 폭로해 실형을 선고받은 사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겠다며 이같이 밝혔다. ‘BBK 저격수’로 불리며 거대권력에 맞서온 그는 옥살이 끝에 사면됐고, 피선거권도 되찾았다. 그의 정치인생에 다시 ‘봄날’이 찾아온 듯했다. 그러나 재심 청구를 발표한 지 하루도 채 안 돼 정 전 의원은 돌연 서울시장 출마 선언을 철회했다. 자신에 대한 성추행 의혹 때문이었다. 그는 이날 “(사건 장소로 지목된) 호텔에서 결제된 신용카드 내역이 발견됐다”며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김민순 정치부 기자 |
그의 ‘찔러보기’에는 단서가 있었다. 정 전 의원은 기자회견 등을 통해 성추행 의혹 폭로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피해자 A씨가 같은 학교 언론고시반 친구라고 밝혔다. 이게 피해자의 신상을 유추할 근거가 됐다. 엄연한 2차 가해다. 그들과 동문이자 해당 고시반에서 함께 공부했던 난 표면적으로 조건에 부합했다. ‘신상털기’의 후폭풍을 맞은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다른 동문의 얼굴 사진과 실명 등이 떠돌았다. 여기에는 ‘역시 성형이 필요해 보인다’, ‘어디에서 돈 받고 거짓 폭로를 하느냐’ 등 악플이 무수히 달렸다. 만약 내가 A씨였다면, A씨가 맞다고 대답했다면 그 네티즌은 내게 어떤 말을 하려고 했을까. ‘실례합니다’나 ‘안녕하세요’ 등 모르는 사람에게 말문을 열기 전 으레 덧붙이는 수식어나 인사조차 없는 한 줄의 질문에서 대강 짐작이 가능했다. 두려웠다. 동시에 내가 A씨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죄책감이 교차했다.
이 사건은 이후 측근의 인터뷰와 사진, 카드 결제 기록 등의 등장으로 반전을 거듭한 끝에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정 전 의원의 선언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상처는 남았다. 피해자의 의도를 의심하고, 신상을 공개하고, 낙인찍는 등 전형적인 2차 가해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가 다른 사건에서 즐겨 썼던 무죄나 결백이라는 말 대신 “호텔에 가지 않았다”는 자가당착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일각의 ‘유명인을 향한 익명 미투는 진정한 미투가 아니다’는 유의 왜곡된 태도 탓이 크다. 같은 시기 ‘나꼼수’ 진행자였던 김어준씨의 “미투를 공작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발언 역시 모든 비난의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리는 데 공헌했다. 정 전 의원은 성폭력을 대하는 이런 그릇된 인식에 편승해 쉽게 여론을 장악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미투를 지지한다”는 정 전 의원의 말을 믿고 싶다. 적어도 그가 2차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한다면 말이다.
김민순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