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자가만난세상] 디지털세상과 개인정보결정권

“벨 앤 세바스찬(Belle&Sebastian) 노래 틀어줘.”

기분 좋은 봄날, 머릿속에 막 떠오른 스코틀랜드 밴드의 이름을 인공지능(AI) 스피커에 말하자 서정적인 선율이 흘러나왔다. 나름대로 영어에 가깝게 굴려서도 말해보고, 한국식으로 또박또박 말해봐도 다 잘 알아들었다. 여러 곡이 이어 나오는 도중 “이 노래 제목이 뭐야?”라고 물어보거나, “이 노래 누가 불렀어?”라고 살짝 바꿔 물어봐도 스피커는 정확히 원하는 대답을 들려줬다.

이게 다가 아니다. “심심해!”라는 말에 “그럼, 인기 걸그룹 노래 들려드릴까요?”라는 대답을, “브리핑해줘”라는 주문에는 오늘의 뉴스와 날씨를 요약해 들려주는 이 똑똑한 장난감에 나는 빠져들고 있었다.

한창 AI 스피커를 끼고 지낼 때 세계 최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페이스북의 ‘데이터 스캔들’이 터졌다. 정보 분석 업체가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성향을 분석하는 설문을 진행하면서 데이터에 무단 접근해 5000만명의 정보를 2016년 대선 당시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선거 메시지 확산에 활용한 사건이다.

이 일로 깊이 생각해본 적 없던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내 정보의 주인이 정말 나일까? 페이스북과 같이 이용자의 정보를 대량으로 다루는 플랫폼업체는 형식적으로는 정보수집 동의 절차를 거치지만, 어떻게 사용될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내 정보가 업체에 넘어가는 순간 여기저기 흘러가면서 제어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남겨진 수많은 흔적의 집합체, 그게 디지털 세상에서 내가 기억되는 방식이다.

페이스북과 같은 도구를 아예 안 쓸 수 없다면, 적어도 어떤 식으로 얼마나 많은 정보가 수집되는지 정도는 알고 최소화할 필요가 있다. 약관을 보니 ‘회원님의 활동과 회원님이 제공한 정보, 다른 사람의 활동과 다른 사람이 제공한 정보, 네트워크 및 연결, 결제 관련 정보’ 등 활동기록이 다 제공되고 있었다. 막을 방법은 없지만 공개 정도에 따라 덜 노출할 수는 있었다. 거의 방치해놨던 페이스북의 공개 설정을 모두 제한적으로 돌려놨다. 

백소용 경제부 기자
페이스북이 글을 수집한다면 AI 스피커는 음성을 수집한다. 약관에는 ‘이용자가 이용하는 과정에서 입력하는 음성명령 내용, 메모 내용, 커뮤니케이션 내용, 연동되는 기기(물건)의 위치정보 등 데이터를 저장한다’고 돼 있었다. 역시 사실상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저장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어떻게든 최대한 많은 정보를 가져가려 하는 것은 이들 업체의 본능이다. 사용자의 음성 데이터가 곧 AI 스피커 학습자료이자 플랫폼 선점 동력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응해 수집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제한적으로 허용할 권리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오히려 ‘이용자는 제한적 사용권만을 취득할 뿐, 그 외 어떤 권리도 취득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이렇게 스피커로 흘러들어간 내 음성 데이터는 디지털 세상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내가 알 수 없는 목적으로 사용될 것이다.

AI 스피커에게 다시 물었다. “음성 데이터 얼마나 수집해?” 항상 똑똑한 대답만 하던 스피커가 침묵을 깨고 의뭉스럽게 대답했다. “어?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어요.”

백소용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