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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한잔 나누며] “한국사회, 아동 목소리 경시… 전문가들 도움 필요”

‘아동권익 보호 전문가’ 임수희 부장 판사 / 가사재판하며 아이들 피해 목격 / 이혼부모 교육책자 직접 만들어 / 아동 이해·보호 향한 열정으로 / 판사·의사·상담가 등과 학회설립 /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도 진행 / 사건 관련자들 치유·화해 도와
임수희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부장판사가 27일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동권익 문제와 회복적 사법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천안=염유섭 기자
“아이는 불완전·미완성의 존재가 아니고 완전한 인격체입니다.”

지난 27일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 사무실에서 만난 임수희(48·사법연수원 32기) 부장판사가 인터뷰 시작과 동시에 내놓은 말이다. 올해 16년차 법관인 그는 법조계에서 아동권익 보호 전문가로 꼽힌다. 2010년 어린이와 청소년, 이혼하려는 부부 등을 주로 상대하는 가사사건 전담판사를 맡은 것이 계기가 됐다.

“지금껏 재판을 진행하며 느낀 점이 무엇인지 아세요. 한국 사회가 보는 아동의 위치가 매우 독특하다는 점입니다. 아이들을 미성숙한 존재로만 여겨 사회가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거예요.”

가사재판을 맡고 나서 그는 아이 권익이 훼손되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이혼하려는 부부한테 자녀는 부차적 문제였다. 충격을 받은 임 부장판사는 작가와 디자이너를 섭외해 자녀가 있는 이혼부모를 위한 교육용 책자를 직접 만들었다. 이 책자를 법원 내 ‘부모교육공동연구회’를 통해 2010∼2011년 10만부 이상 찍어 전국 법원에 배포했고 현재까지 부모교육 공식 교재로 사용 중이다. 그는 “양육권 등을 결정하기 위해 아이에게 ‘엄마와 아빠 중 누가 좋으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고 아이 마음 상태를 적절히 알아내 보호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런 열정으로 지난해 7월 동료 판사, 법원 가사조사관, 의사, 아동상담가 등과 ‘아동권익보호학회’를 만들었다. 창립 직후 서울중앙지법에서 ‘협의이혼과 재판상 이혼 절차 각 단계에서 아동의 보호’란 주제의 심포지엄을 열었다. 현재 그는 학회 홍보이사로 아동 관련 연구를 독려하고 학술서를 펴내는 일 등을 한다.

“아이들은 삶과 권리를 보호받아야 할 존재인데도 사회는 이들이 누려야 할 정당한 권익에 눈을 감기 일쑤죠. 우리 같은 판사와 법원 조사관, 의사, 상담가 등 현장에서 아이를 접하는 전문가들이 대신 목소리를 내줘야 하는 이유입니다.”

임 부장판사는 자연히 아동을 상대로 한 성범죄에도 관심이 많다. 현행법은 13세 미만 아동과 성관계를 하는 경우 당사자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상대방을 처벌한다. 즉 13세 이상 청소년과 성관계는 본인만 동의하면 법적 문제를 삼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는 이 연령기준을 적어도 16세 이상으로 올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보통 만 18세는 담배와 술을 못 하게 하면서 성관계는 13세 미만이라는 건 기준이 너무 낮아요.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드는데 미국, 영국 등 세계 200여개 나라의 성관계 동의 연령기준은 16세 이상으로 우리보다 높습니다. 우리도 기준을 올리되 텍사스 등 미국 일부 주에서 시행하는 ‘로미오와 줄리엣 법’처럼 예외를 두면 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법이란 자신과 4살 이상 차이가 나는 12∼16세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하면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강하게 처벌하지만, 아이들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해 나이 차가 3~4세인 미성년 남녀가 성관계를 하는 경우는 처벌 대상에서 빼는 것이다.

부모 이혼이나 성폭행으로 상처입은 어린이 권익 보호를 향한 정열은 그를 ‘회복적 사법’ 전문가로 만들었다. 회복적 사법이란 형사처벌과 별개로 이해관계자 상호간 대화를 통해 피해 치유와 관계 회복을 도모하는 것을 뜻한다. 임 부장판사는 인천지법 부천지원에 근무하던 2013년 국내 최초로 ‘형사재판 회복적 사법 시범실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선량하게 살아온 어느 가장이 새벽 출근길에 젊은 여성을 차로 치어 그만 숨지게 했습니다. 이 여성은 아르바이트 직장에 빨리 가려고 도로를 무단횡단하다 변을 당한 것이어서 운전자 못지않게 피해자 측 과실이 컸죠. 딸을 잃은 유족도, 가장이 처벌을 받을 처지에 놓인 가족도 모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결국 회복적 사법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고통을 공감하고 치유한 끝에 극적인 화해와 사과, 그리고 합의가 이뤄졌습니다.”

임 부장판사는 원래 패션디자이너를 꿈꿔 서울대 의류학과에 입학했다. ‘데모’와 ‘최루탄’으로 상징되는 격동의 1980년대에 대학생활을 했다. 그는 “사회 변화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고민하다가 법을 배우면 사회에 기여할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법조인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올 2월 천안지원에 부임한 뒤로는 조정 시스템을 통해 분쟁을 대화로 해결하는 데 노력하고 있어요. 대화를 통해 합의하고 화해를 이끈다는 점에서 조정은 회복적 사법이 잘 구현될 수 있는 통로죠. 당사자들 말을 잘 들어주고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을 함께 찾는다면 사법의 신뢰 제고에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천안=염유섭 기자 yuseob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