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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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대한민국 여권

아일란 쿠르디. 2015년 9월2일 터키 휴양도시 보드룸의 해변에서 엎드려 숨진 채로 발견돼 지구촌을 울린 시리아의 쿠르드족 난민 꼬마(당시 3세)다. 쿠르디 가족 4명은 에게해를 가로질러 그리스로 가려고 고무보트를 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아버지 압둘라를 제외한 전원이 변을 당했다. 그 집 막내가 쿠르디다.

여행 목적지는 그리스가 아니라 캐나다였다. 당연히 항공 여행을 하는 것이 훨씬 편하고 안전하다. 쿠르디 가족도 그것을 잘 알았다. 항공료도 있었다. 그런데도 고무보트를 탔다. 여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리아 정부는 쿠르드족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여권도 발급하지 않았다. 쿠르디 가족은 여권과 입국사증(비자)을 구할 길이 없어 거친 바다에 몸을 맡겼던 것이다.

여권은 해외여행을 하는 자국민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특정 정부가 발행하는 신분증명서다. 여행과 교류 활성화를 위해서라면 없는 게 낫다. 19세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바로 그런 생각으로 ‘억압적 발명품’, ‘쓸모없는 장애물’이라며 여권을 폐기했다. 하지만 여권은 불사조처럼 되살아났다. 전쟁과 국가안보 등의 필요성 때문이다. 현대적 여권의 골격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연맹이 개최한 ‘여권과 세관, 그리고 여행허가증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완성됐다.

대한민국 여권이 2020년부터 차세대 전자여권으로 탈바꿈한다. 겉면은 녹색에서 남색으로 바뀌고, 속지는 여러 전통 문양으로 꾸며지는 모양이다. 디자인 변경만의 문제가 아니다. 위변조를 막을 보안 차원의 과제도 있다. 더더욱 중차대한 것은 여권의 힘, 즉 ‘여권 파워’다. 대한민국 여권을 소지하면 지구촌 곳곳을 제약 없이 누비고 다닐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 대한민국 ‘여권 파워’는 막강하다. 비자 면제, 국가 인식, 개인 자유 수준 등을 따져 등급을 매기는 ‘헨리 패스포트 지수’에서 세계 3위에 등재돼 있다. 178개국이 비자 면제 혜택을 주니 대견하다. 대한민국 여권이 세계 1위라는 지표도 있다. 쿠르디 가족에게도 이런 여권이 있었다면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여권 파워’가 더 강력해지길 기원한다. 국가적 분발 없이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새삼 명심할 일이다.

이승현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