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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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호칭 외교

북핵 6자회담의 미국 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을 DPRK로 부르자 화제가 됐다. 2007년 6월 방북 뒤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 때였다. 그는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North Korea’ 대신에 북한의 공식 영어 국가명을 부른 것은 외교적 배려였다. 그는 2006년 7월 일본에서 가진 회견 때도 DPRK를 말했다. 미 국무부도 DPRK를 쓰다가 6자회담 협상이 틀어진 뒤에는 North Korea로 돌아갔다.

공식 석상에서 언급되는 호칭은 외교적 관계를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국가뿐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2001년 3월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한 뒤 “this man”이라고 지칭했다. 부시 대통령의 용어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었지만 외교적 갈등과 연계돼 분분한 해석을 낳았다. 김 대통령이 미국이 집요하게 요구했던 미사일방어체계(MD) 가입을 거부하자 “이 사람”으로 비하했다는 것이었다. 논란이 커지자 백악관은 “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취지였고 교황도 그렇게 불렀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국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부시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easy man(만만한 사람)”이라고 불러 또 논란을 일으켰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호칭은 훨씬 적대적이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못박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국에 맞섰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일본제국을 추축국(Axis Powers)이라고 부른 것에 빗댄 말이다. 강석주 외무성 부상은 이에 분개해 우라늄 농축에 착수했다고 했다. 당시 국무부 군축차관이던 존 볼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보좌관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포악한 독재자”라고 했다.

북한을 방문했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Chairman(위원장)’이라고 호칭했다. 불과 수개월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꼬마 로켓맨”이라고 조롱했던 것을 떠올리면 격세지감이다. ‘늙다리 미치광이’, ‘작은 뚱보’라며 말폭탄을 서로 날렸던 북·미 정상이 만나면 첫 표정은 어떨까.

한용걸 논설위원